느낌과 갈애 사이 - 자유의 분기점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는 자리 - 수행이 가장 또렷하게 손댈 수 있는 곳

“벗들이여, 눈과 형상을 조건으로 눈의 의식이 일어납니다. 이 셋의 만남이 접촉이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습니다. 느낀 것을 인식하고, 인식한 것을 생각하며, 생각한 것을 확산시킵니다. 확산시킨 것을 원인으로, 과거·미래·현재의 눈으로 아는 형상들에 대해 확산된 인식과 관념이 그 사람을 덮칩니다.”

Cakkhuñcāvuso,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ṁ, tiṇṇaṁ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yaṁ vedeti taṁ sañjānāti, yaṁ sañjānāti taṁ vitakketi, yaṁ vitakketi taṁ papañceti, yaṁ papañceti tatonidānaṁ purisaṁ papañcasaññāsaṅkhā samudācaranti atītānāgatapaccuppannesu cakkhuviññeyyesu rūpesu.

맛지마 니까야 MN 18 꿀덩어리경 (Madhupiṇḍikasu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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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깟짜나의 상세 해설은 눈의 갈래를 온전히 펼치는 데서 시작합니다. 눈·형상·눈의 의식 세 가지의 만남을 접촉이라 하고, 접촉에서 느낌, 느낌에서 지각, 지각에서 생각, 생각에서 확산으로 이어집니다. 마지막에는 주어가 확산된 지각과 관념으로 바뀌어, 과거·미래·현재의 형상과 관련해 사람을 덮칩니다. 이 연쇄는 세존이 말한 “덮치는 근원”을 감각 경험 안에서 설명하며, 이어 귀·코·혀·몸에서는 공식 생략으로 반복됩니다.

묵상

느낌에서 지각, 생각, 확산으로 이어지는 문장 가운데 지금 가장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 고리는 어느 것인가요?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다면, 눈앞의 형상을 보는 감각만 잠시 살펴도 괜찮을까요?

이렇게 좋아함과 싫어함에 빠진 그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어떤 느낌을 느끼든, 그 느낌을 기뻐하고 환영하며 붙들고 머무느니라. 그 느낌을 기뻐하고 환영하며 붙들고 머무는 그에게 즐김이 일어나느니라. 느낌에 대한 즐김이 곧 집착이요,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과 근심·슬픔·괴로움·낙담·절망이 생겨나느니라.

So evaṁ anurodhavirodhaṁ samāpanno yaṁ kiñci vedanaṁ vedeti sukhaṁ vā dukkhaṁ vā adukkhamasukhaṁ vā, so taṁ vedanaṁ abhinandati abhivadati ajjhosāya tiṭṭhati. Tassa taṁ vedanaṁ abhinandato abhivadato ajjhosāya tiṭṭhato uppajjati nandī. Yā vedanāsu nandī tadupādānaṁ, tassupādānapaccayā bhavo, bhavapaccayā jāti, jātipaccayā jarāmaraṇaṁ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맛지마 니까야 MN 38 갈애 멸진의 긴 경 (Mahātaṇhāsaṅkhayasu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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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에서 괴로움까지의 전 과정을 부처님이 한 문장에 압축하신 대목입니다. 중간의 짧은 낱말 하나가 결정적입니다 - 난디(nandī), "즐김". 느낌이 일어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느낌을 "기뻐하고 환영하며 붙들고 머무는(abhinandati abhivadati ajjhosāya tiṭṭhati)" 세 단계 동작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못을 박듯 정의하십니다 - "느낌에 대한 즐김이 곧 집착이니라." 즐김과 집착 사이에 시간차가 없습니다. 같은 것의 두 이름입니다. 여기서 무거운 사실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하루 종일 하고 있는 일, 즉 좋은 느낌은 더 오래 붙들고 싫은 느낌은 밀어내는 그 사소한 작업이, 사실은 존재 전체를 굴리는 바퀴의 첫 톱니라는 것입니다.

묵상

좋은 느낌이 지나갈 때 "조금만 더" 하고 붙드는 순간이 있나요? 그 붙듦은 아주 짧고 가벼워서 집착처럼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바로 그것을 집착이라 부르셨어요. 왜 그러셨을까요?

“존자시여, 세 느낌에는 각각 어떤 잠재 성향이 잠재합니까?” “위사카 벗이여, 즐거운 느낌에는 탐욕의 잠재 성향이 잠재하고, 괴로운 느낌에는 반감의 잠재 성향이 잠재하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는 무명의 잠재 성향이 잠재합니다.”

“Sukhāya panāyye, vedanāya kiṁ anusayo anuseti, dukkhāya vedanāya kiṁ anusayo anuseti, adukkhamasukhāya vedanāya kiṁ anusayo anusetī”ti? “Sukhāya kho, āvuso visākha, vedanāya rāgānusayo anuseti, dukkhāya vedanāya paṭighānusayo anuseti, adukkhamasukhāya vedanāya avijjānusayo anusetī”ti.

맛지마 니까야 MN 44 교리문답의 짧은 경 (Cūḷavedallasu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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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사카가 세 느낌 각각에 어떤 잠재 성향이 놓이는지 묻고 담마딘나가 세 쌍으로 답합니다. 즐거운 느낌에는 탐욕, 괴로운 느낌에는 반감,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는 무명의 잠재 성향입니다. 질문과 답을 한 의미 단위로 읽어야 세 대응이 무엇에 대한 답인지 분명해집니다. 이어지는 문답은 이 성향들이 모든 느낌에 언제나 잠재하는 것은 아니며 수행의 특정 느낌에서는 그렇지 않음을 밝힙니다.

묵상

강한 즐거움과 괴로움만 살피고 중립적인 느낌은 중요하지 않다고 넘기나요? 세 느낌과 세 잠재 성향의 대응을 정답표처럼 단정하기보다, 지금의 느낌을 아는 일이 자동 반응을 알아차리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지 살펴볼까요?

그가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매이지 않은 채 느끼고,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 매이지 않은 채 느끼며,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 매이지 않은 채 느끼느니라.

So sukhañce vedanaṁ vedayati, visaññutto naṁ vedayati. Dukkhañce vedanaṁ vedayati, visaññutto naṁ vedayati. Adukkhamasukhañce vedanaṁ vedayati, visaññutto naṁ vedayati.

상윳따 니까야 SN 36.6 두 화살경 (Sallasu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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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경은 두 번째 화살의 비유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경전의 결론은 그 뒤에 있습니다. 부처님은 배운 성스러운 제자가 느낌을 겪는 방식을 위산늇또(visaññutto)라는 한 낱말로 표현하십니다 - "묶이지 않은 채", "풀려난 채". 주의할 것은 앞의 동사입니다. 여전히 "느낀다(vedayati)"입니다. 즐거움을 안 느끼는 것도, 괴로움을 못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다 느끼되 매이지 않을 뿐입니다. 느낌과 갈애 사이의 분기점이란 결국 이 한 낱말의 유무입니다. 매이면 갈애로 가고, 매이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끝납니다. 감각을 없애는 것이 수행이라는 오해가 이 문장 하나로 정리됩니다.

묵상

좋은 것을 좋다고 느끼면서도 그것에 매달리지 않는 상태를 상상할 수 있나요? 아주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이 곡이 끝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 없이 그냥 듣는 순간 - 그런 순간이 있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