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들이여, 믿음으로 집을 떠나 집 없는 삶으로 나아간 좋은 집안의 사람이 다시 있다고 하자.
…
그는 재물과 존경과 명성에 만족하지 않고 바라던 것을 다 이루었다 여기지 않느니라.
그는 그것으로 자신을 높이지도 남을 낮추지도 않느니라.
그는 거기에 취하지 않고 게을러지지 않으니, 부지런히 계행을 성취하느니라.
Idha pana, bhikkhave, ekacco kulaputto saddhā agārasmā anagāriyaṁ pabbajito hoti: …pe… So tena lābhasakkārasilokena na attamano hoti na paripuṇṇasaṅkappo. So tena lābhasakkārasilokena na attānukkaṁseti, na paraṁ vambheti. So tena lābhasakkārasilokena na majjati nappamajjati na pamādaṁ āpajjati. Appamatto samāno sīlasampadaṁ ārādheti.
맛지마 니까야 MN 29 심재의 큰 비유경 (Mahāsāropamasutta) 배경
앞서 본 수행자는 재물과 존경과 명성에 만족해 청정한 삶의 가지와 잎에서 멈추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마음으로 출가한 이들이 모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 또 다른 수행자는 똑같이 재물과 존경과 명성을 얻지만,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높이지도 남을 낮추지도 않으며, 거기에 취해 게을러지지도 않습니다. 그는 그 대신 부지런히 계행을 갖추어 나갑니다. 부처님은 이 대조를 통해 같은 상황에서도 길이 갈릴 수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무엇을 얻었는가보다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다음 걸음을 결정합니다.
묵상
지금 이룬 것에 만족해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고 있지는 않나요? 얻은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거기 머물지 않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런 마음은 오늘 어디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까요?
이를 청정한 삶의 가지와 잎을 붙잡고
거기서 멈춘 수행자라 하느니라.
…
그러나 부지런한 이는 계행을 성취하느니라.
그가 계행에 만족하여 모두 이루었다고 여기고
자신을 높이며 남을 낮추어 말하느니라.
‘나는 계행이 바르고 성품이 좋지만
다른 수행자들은 계행이 없고 성품이 나쁘다.’
그는 계행에 취해 게을러지고 괴롭게 머무느니라.
Ayaṁ vuccati, bhikkhave, bhikkhu sākhāpalāsaṁ aggahesi brahmacariyassa; tena ca vosānaṁ āpādi. … Appamatto samāno sīlasampadaṁ ārādheti. So tāya sīlasampadāya attamano hoti paripuṇṇasaṅkappo. So tāya sīlasampadāya attānukkaṁseti, paraṁ vambheti: ‘ahamasmi sīlavā kalyāṇadhammo, ime panaññe bhikkhū dussīlā pāpadhammā’ti. So tāya sīlasampadāya majjati pamajjati pamādaṁ āpajjati, pamatto samāno dukkhaṁ viharati.
맛지마 니까야 MN 29 심재의 큰 비유경 (Mahāsāropamasutta) 배경
첫 수행자는 괴로움을 끝내려 출가했지만 재물과 존경과 명성에 취해, 청정한 삶의 가지와 잎에서 멈춥니다. 다음 수행자도 같은 절실함으로 길을 나서 명예를 얻지만 거기에 취하지 않고 계행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계행을 모두 이룬 최종 목적이라고 여기고 자신을 높이며 남을 낮추면 다시 게을러지고 괴롭게 머뭅니다. 명예를 넘어선 진전도 새로운 자만의 근거가 되는 순간 길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묵상
바른 행동을 지킨다는 자부심이 다른 사람을 너무 쉽게 낮추는 마음으로 바뀐 적은 없나요? 좋은 기준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그것으로 나와 남의 우열을 함부로 가르지 않는 길은 어떤 모습일까요?
또 다른 이는 재물과 존경과 명성에도 만족하지 않아 바라던 것을 다 이루었다 여기지 않으며,
그것으로 자신을 높이지도 남을 낮추지도 않고 거기에 취하지 않아, 부지런히 계행을 성취하느니라.
그러나 그는 계행에 만족하나 아직 다 이루었다고는 여기지 않느니라.
그는 그것으로도 자신을 높이지도 남을 낮추지도 않으며, 거기에 취하지도 게을러지지도 않느니라.
So tena lābhasakkārasilokena na attamano hoti na paripuṇṇasaṅkappo. So tena lābhasakkārasilokena na attānukkaṁseti, na paraṁ vambheti. So tena lābhasakkārasilokena na majjati nappamajjati na pamādaṁ āpajjati, appamatto samāno sīlasampadaṁ ārādheti. So tāya sīlasampadāya attamano hoti no ca kho paripuṇṇasaṅkappo. So tāya sīlasampadāya na attānukkaṁseti, na paraṁ vambheti. So tāya sīlasampadāya na majjati nappamajjati na pamādaṁ āpajjati.
맛지마 니까야 MN 29 심재의 큰 비유경 (Mahāsāropamasutta) 배경
이 수행자는 앞서 재물과 존경과 명성에도 만족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지런히 갖춘 계행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계행을 이루었다는 사실에 기쁘긴 하되 아직 다 이루었다고 여기지 않고, 자신을 높이거나 남을 낮추지도 않습니다. 그는 계행에 취해 게을러지는 대신 다시 부지런히 나아가 집중을 성취합니다. 좋은 성취일수록 거기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커지지만, 이 수행자는 매 단계에서 같은 물음을 되풀이합니다. 이것이 정말 마지막인가. 그 물음이 다음 걸음을 열어 줍니다.
묵상
잘하고 있다는 확신이 오히려 더 배우고 나아갈 필요를 가리고 있지는 않나요? 지금의 만족스러운 상태를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다시 말해 줄 수 있을까요?
심재를 찾는 사람이 큰 나무를 만나
심재와 속재목과 나무껍질을 지나쳐
새순만 잘라 들고 심재라고 여긴다면,
눈 밝은 이는 그가 나무의 부분을 구별하지 못해
심재로 만들 일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니라.
…
이를 청정한 삶의 새순을 붙잡고
거기서 멈춘 수행자라 하느니라.
Seyyathāpi, bhikkhave, puriso sāratthiko sāragavesī sārapariyesanaṁ caramāno mahato rukkhassa tiṭṭhato sāravato atikkammeva sāraṁ atikkamma phegguṁ atikkamma tacaṁ, papaṭikaṁ chetvā ādāya pakkameyya ‘sāran’ti maññamāno. Tamenaṁ cakkhumā puriso disvā evaṁ vadeyya: ‘na vatāyaṁ bhavaṁ puriso aññāsi sāraṁ, na aññāsi phegguṁ, na aññāsi tacaṁ, na aññāsi papaṭikaṁ, na aññāsi sākhāpalāsaṁ. Tathā hayaṁ bhavaṁ puriso sāratthiko sāragavesī sārapariyesanaṁ caramāno mahato rukkhassa tiṭṭhato sāravato atikkammeva sāraṁ atikkamma phegguṁ atikkamma tacaṁ, papaṭikaṁ chetvā ādāya pakkanto “sāran”ti maññamāno; yañcassa sārena sārakaraṇīyaṁ tañcassa atthaṁ nānubhavissatī’ti. … Ayaṁ vuccati, bhikkhave, bhikkhu papaṭikaṁ aggahesi brahmacariyassa; tena ca vosānaṁ āpādi.
맛지마 니까야 MN 29 심재의 큰 비유경 (Mahāsāropamasutta) 배경
계행은 나무의 새순에 비유됩니다. 가지와 잎이라는 명예보다 목적에 가까운 중요한 진전이지만 아직 심재는 아닙니다. 눈 밝은 사람은 새순을 가져가 심재라고 여기는 사람이 나무의 부분을 구별하지 못해 목적한 일을 이루지 못한다고 봅니다. 수행자도 괴로움을 끝내려던 첫 뜻과 명예를 넘어 계행을 얻었더라도, 계행에 취해 거기서 멈추면 청정한 삶의 심재에는 닿지 못합니다.
묵상
이전보다 분명히 나아졌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여기지는 않나요? 중요한 진전은 충분히 기뻐하되 아직 더 깊이 살펴야 할 것이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을 함께 지닐 수 있을까요?
부지런한 이는 집중을 성취하느니라.
그가 집중에 만족하여 모두 이루었다고 여기고
자신을 높이며 남을 낮추어 말하느니라.
‘나는 마음이 집중되고 하나로 모였지만
다른 수행자들은 집중되지 않아 마음이 흩어져 있다.’
그는 집중에 취해 게을러지고 괴롭게 머무느니라.
Appamatto samāno samādhisampadaṁ ārādheti. So tāya samādhisampadāya attamano hoti paripuṇṇasaṅkappo. So tāya samādhisampadāya attānukkaṁseti, paraṁ vambheti: ‘ahamasmi samāhito ekaggacitto, ime panaññe bhikkhū asamāhitā vibbhantacittā’ti. So tāya samādhisampadāya majjati pamajjati pamādaṁ āpajjati, pamatto samāno dukkhaṁ viharati.
맛지마 니까야 MN 29 심재의 큰 비유경 (Mahāsāropamasutta) 배경
다음 수행자는 괴로움을 끝내려 길을 나서 명예와 계행을 차례로 얻지만, 어느 것에도 취하지 않고 계속 부지런히 나아가 집중을 성취합니다. 그러나 깊고 하나 된 마음도 자신을 높이고 남을 낮추는 근거가 되면 또 하나의 정거장이 됩니다. 집중이 아무리 평온하고 뛰어나 보여도 그것을 소유한 나를 세우는 순간 방일이 생깁니다. 그렇게 머문다면 출가할 때 품었던 괴로움 전체의 소멸이라는 목적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묵상
고요하거나 집중이 잘된 경험을 특별하고 뛰어난 나의 증거로 붙들고 있지는 않나요? 좋은 마음 상태를 편안히 누리면서도 그것이 오고 가는 조건임을 알고 다음 이해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심재를 찾는 사람이 큰 나무를 만나
심재와 속재목을 지나쳐 나무껍질만 잘라 들고
심재라고 여긴다면,
눈 밝은 이는 그가 나무의 부분을 구별하지 못해
심재로 만들 일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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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청정한 삶의 나무껍질을 붙잡고
거기서 멈춘 수행자라 하느니라.
Seyyathāpi, bhikkhave, puriso sāratthiko sāragavesī sārapariyesanaṁ caramāno mahato rukkhassa tiṭṭhato sāravato atikkammeva sāraṁ atikkamma phegguṁ tacaṁ chetvā ādāya pakkameyya ‘sāran’ti maññamāno. Tamenaṁ cakkhumā puriso disvā evaṁ vadeyya ‘na vatāyaṁ bhavaṁ puriso aññāsi sāraṁ, na aññāsi phegguṁ, na aññāsi tacaṁ, na aññāsi papaṭikaṁ, na aññāsi sākhāpalāsaṁ. Tathā hayaṁ bhavaṁ puriso sāratthiko sāragavesī sārapariyesanaṁ caramāno mahato rukkhassa tiṭṭhato sāravato atikkammeva sāraṁ atikkamma phegguṁ tacaṁ chetvā ādāya pakkanto “sāran”ti maññamāno. Yañcassa sārena sārakaraṇīyaṁ tañcassa atthaṁ nānubhavissatī’ti. … Ayaṁ vuccati, bhikkhave, bhikkhu tacaṁ aggahesi brahmacariyassa; tena ca vosānaṁ āpādi.
맛지마 니까야 MN 29 심재의 큰 비유경 (Mahāsāropamasutta) 배경
집중은 나무껍질에 비유됩니다. 비유의 단계에서는 새순보다 심재에 더 가깝고 단단하지만 여전히 심재는 아닙니다. 집중에 취한 수행자는 깊은 고요를 얻었다는 이유로 자신을 높이고 남을 낮추며, 더 나아갈 필요가 없다고 여겨 게을러집니다. 눈 밝은 사람이 나무껍질과 심재를 구별하듯, 수행자는 평온한 집중과 흔들리지 않는 해탈을 구별해야 합니다. 단계가 깊어질수록 멈춤이 더 그럴듯해지므로 처음 목적을 기억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묵상
겉으로도 아주 깊어 보이는 성취라서 더 이상 진지하게 질문하지 않게 된 것은 없나요? 지금의 고요와 능력이 괴로움을 완전히 끝냈는지, 처음 목적에 비추어 다시 살펴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