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들이여, 어떤 이들은 여덟 근거로 죽은 뒤 자아가 온전하지만 인식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느니라. 그 여덟 근거는 무엇인가? ‘자아는 죽은 뒤 물질적이며 인식하지 않는다. 비물질적이며 인식하지 않는다. 물질적이면서 비물질적이고 인식하지 않는다 ….’”
Santi, bhikkhave, eke samaṇabrāhmaṇā uddhamāghātanikā asaññīvādā uddhamāghātanaṁ asaññiṁ attānaṁ paññapenti aṭṭhahi vatthūhi. Te ca bhonto samaṇabrāhmaṇā kimāgamma kimārabbha uddhamāghātanikā asaññīvādā uddhamāghātanaṁ asaññiṁ attānaṁ paññapenti aṭṭhahi vatthūhi? ‘Rūpī attā hoti arogo paraṁ maraṇā asaññī’ti naṁ paññapenti. ‘Arūpī attā hoti arogo paraṁ maraṇā asaññī’ti naṁ paññapenti. ‘Rūpī ca arūpī ca attā hoti …pe….
디가 니까야 DN 1 범망경 (Brahmajālasutta)배경
인식하는 자아의 열여섯 다음에는 인식 없는 자아의 여덟 조합이 옵니다. 첫 세 갈래는 물질·비물질·둘 다이고, 모두 죽은 뒤 온전하며 인식하지 않는다는 같은 술어를 가지며 셋째는 공식 생략으로 줄었습니다. 인식의 유무가 바뀌어도 자아의 형태와 범위를 고정해 조합하는 방식은 그대로 이어집니다. 인식이 없다는 전제를 붙여도 물질·비물질의 사중 형식은 그대로 작동해, 자아 설정의 틀이 반복됩니다.
묵상
인식이 없는 자아를 상상하려 할 때 어떤 모순이나 빈틈이 느껴지나요? 이해되지 않는 상태를 억지로 그리기보다, “자아”라는 말이 계속 전제되는 점을 볼 수 있을까요? 인식이 없는데 물질·비물질·양쪽 자아를 구별한다면 그 구별을 경험하는 주체는 어떻게 상정되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