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는 말한다. ‘존자여, 그대가 말한 자아는 있다. 존자여, 하지만 그렇게는 이 자아가 바르게 끊어지지 않는다. 존자여, 형태 인식을 넘어 부딪침 인식이 사라지고 다양성에 주의하지 않아 “공간은 무한하다”고 알아 그 영역에 든 다른 자아가 있다. 그대는 모르고 못 보며 나는 안다, 본다. 존자여, 그 자아가 몸이 무너져 끊어지고 파괴되어 사후에 없을 때, 존자여, 바르게 끊어진다.’ 이렇게 존재하는 자의 단절·파괴·소멸을 주장한다.
Tamañño evamāha: ‘atthi kho, bho, eso attā, yaṁ tvaṁ vadesi, neso natthīti vadāmi; no ca kho, bho, ayaṁ attā ettāvatā sammā samucchinno hoti. Atthi kho, bho, añño attā sabbaso rūpasaññānaṁ samatikkamā paṭighasaññānaṁ atthaṅgamā nānattasaññānaṁ amanasikārā “ananto ākāso”ti ākāsānañcāyatanūpago. Taṁ tvaṁ na jānāsi na passasi. Tamahaṁ jānāmi passāmi. So kho, bho, attā yato kāyassa bhedā ucchijjati vinassati, na hoti paraṁ maraṇā, ettāvatā kho, bho, ayaṁ attā sammā samucchinno hotī’ti. Ittheke sato sattassa ucchedaṁ vināsaṁ vibhavaṁ paññapenti.
디가 니까야 DN 1 범망경 (Brahmajālasutta)배경
넷째 단멸론은 물질적 자아들을 넘어 첫 무색의 명상 영역을 자아로 삼습니다. 형태 인식을 넘음·부딪침 인식의 사라짐·다양성에 주의하지 않음의 세 조건과 “공간은 무한하다”는 앎, 무한 공간 영역을 정확히 잇습니다. 깊은 명상 상태를 자아로 동일시한 뒤 그 상태의 끝을 궁극 단절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물질을 초월했다는 체험도 “다른 자아”로 이름 붙이는 순간, 경험의 경계와 자아의 경계가 다시 하나로 굳습니다.
묵상
경계가 사라진 듯한 넓은 경험을 “이것이 진짜 나”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을까요? 넓음은 그대로 느끼되 자아라는 이름을 잠시 보류하면 무엇이 남나요? 형태 인식을 완전히 넘어 “공간은 무한하다”는 영역에 들어간 경험에서 자아는 어디에 놓였다고 보이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