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는 말한다. ‘존자여, 그대가 말한 자아는 있다. 존자여, 하지만 그렇게는 이 자아가 지금 여기의 최상 열반에 이르지 않는다. 왜인가? 첫 선정의 생각 놓기와 이어 가기는 거칠다. 존자여, 이 자아가 그것들을 가라앉혀 내적 맑음과 마음의 하나됨을 이루고, 두 생각 작용 없이 집중에서 난 희열과 행복의 둘째 선정에 들 때, 존자여, 지금 여기서 최상의 열반에 이른다.’ 이렇게 지금 여기의 최상 열반을 주장한다.”
Tamañño evamāha: ‘atthi kho, bho, eso attā, yaṁ tvaṁ vadesi, neso natthīti vadāmi; no ca kho, bho, ayaṁ attā ettāvatā paramadiṭṭhadhammanibbānaṁ patto hoti. Taṁ kissa hetu? Yadeva tattha vitakkitaṁ vicāritaṁ, etenetaṁ oḷārikaṁ akkhāyati. Yato kho, bho, ayaṁ attā vitakkavicārānaṁ vūpasamā ajjhattaṁ sampasādanaṁ cetaso ekodibhāvaṁ avitakkaṁ avicāraṁ samādhijaṁ pītisukhaṁ dutiy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ettāvatā kho, bho, ayaṁ attā paramadiṭṭhadhammanibbānaṁ patto hotī’ti. Ittheke sato sattassa paramadiṭṭhadhammanibbānaṁ paññapenti.
디가 니까야 DN 1 범망경 (Brahmajālasutta)배경
셋째 견해는 첫 선정 안의 생각 놓기와 이어 가기를 거친 요소로 보고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두 생각 작용의 멎음, 내적 맑음·마음의 하나됨, 두 작용 없음, 삼매에서 난 희열과 행복의 순서를 보존합니다. 더 미세한 상태로 옮겨 가도 그것을 자아의 궁극적 열반이라고 붙잡는 구조는 계속됩니다. 생각을 놓고 이어 가는 두 작용을 거칠다고 보아 멎게 하지만, 둘째 선정 역시 “지금의 최상 열반”이라는 견해에 붙잡힙니다.
묵상
생각의 움직임이 잦아들 때 완성에 이른 듯한 안도감이 생기나요? 고요함을 충분히 누리면서도 그 경험을 영구한 결론으로 만들지 않을 가능성은 어떤가요? 생각을 놓고 이어 가는 두 작용을 거칠다고 부른 뒤 얻은 내적 확신과 마음의 통일은 무엇을 궁극처럼 보이게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