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는 말한다. ‘존자여, 그대가 말한 자아는 있다. 존자여, 하지만 그렇게는 이 자아가 지금 여기의 최상 열반에 이르지 않는다. 왜인가? 둘째 선정의 희열과 마음의 들뜸은 거칠다. 존자여, 이 자아가 희열을 놓아 평정하고 알아차리며 분명히 알고 몸으로 행복을 겪으며, 성자들이 “평정하고 알아차리며 행복히 머문다”고 하는 셋째 선정에 들 때, 존자여, 지금 여기서 최상의 열반에 이른다.’ 이렇게 지금 여기의 최상 열반을 주장한다.
Tamañño evamāha: ‘atthi kho, bho, eso attā, yaṁ tvaṁ vadesi, neso natthīti vadāmi; no ca kho, bho, ayaṁ attā ettāvatā paramadiṭṭhadhammanibbānaṁ patto hoti. Taṁ kissa hetu? Yadeva tattha pītigataṁ cetaso uppilāvitattaṁ, etenetaṁ oḷārikaṁ akkhāyati. Yato kho, bho, ayaṁ attā pītiyā ca virāgā upekkhako ca viharati, sato ca sampajāno, sukhañca kāyena paṭisaṁvedeti, yaṁ taṁ ariyā ācikkhanti “upekkhako satimā sukhavihārī”ti, tatiy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ettāvatā kho, bho, ayaṁ attā paramadiṭṭhadhammanibbānaṁ patto hotī’ti. Ittheke sato sattassa paramadiṭṭhadhammanibbānaṁ paññapenti.
디가 니까야 DN 1 범망경 (Brahmajālasutta)배경
넷째 견해는 둘째 선정의 희열을 다시 거친 요소로 판단합니다. 희열과 마음 들뜸의 두 거친 요소, 희열의 사라짐, 평정·알아차림·분명한 앎·몸의 행복과 성자들의 선언을 거쳐 셋째 선정에 듭니다. 고요가 깊어져도 그 경험을 자아의 최종 상태로 동일시하면 지금 여기 열반론의 또 다른 근거가 됩니다. 희열과 들뜸을 놓은 셋째 선정은 더 평온하지만, 경험의 미세함만으로 자아의 궁극 상태가 증명되지는 않습니다.
묵상
강한 기쁨보다 평정이 더 깊고 참되다고 느껴지는 때가 있나요? 두 상태를 서열화하기보다 각각 생기고 사라지는 조건을 조금 더 차분히 알아볼 수 있을까요? 희열의 들뜸을 거칠다고 놓은 셋째 선정에서 평정·알아차림·분명한 앎은 어떤 새 매력을 만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