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라는 마음 기울임도 거친 것으로 보다

선정의 가장 미세한 평정도 자아의 영원한 최종 상태로 붙잡으면 다섯째 견해가 됩니다.

다른 이는 말한다. ‘존자여, 그대가 말한 자아는 있다. 존자여, 하지만 그렇게는 이 자아가 지금 여기의 최상 열반에 이르지 않는다. 왜인가? “행복하다”는 마음의 기울임도 거칠다. 존자여, 이 자아가 즐거움과 괴로움을 버리고 앞선 기쁨과 슬픔을 사라지게 하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고 평정과 알아차림이 깨끗한 넷째 선정에 들 때, 존자여, 지금 여기서 최상의 열반에 이른다.’ 이렇게 지금 여기의 최상 열반을 주장한다.

Tamañño evamāha: ‘atthi kho, bho, eso attā, yaṁ tvaṁ vadesi, neso natthīti vadāmi; no ca kho, bho, ayaṁ attā ettāvatā paramadiṭṭhadhammanibbānaṁ patto hoti. Taṁ kissa hetu? Yadeva tattha sukhamiti cetaso ābhogo, etenetaṁ oḷārikaṁ akkhāyati. Yato kho, bho, ayaṁ attā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va somanassadomanassānaṁ atthaṅgamā adukkhamasukhaṁ upekkhāsatipārisuddhiṁ catutth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ettāvatā kho, bho, ayaṁ attā paramadiṭṭhadhammanibbānaṁ patto hotī’ti. Ittheke sato sattassa paramadiṭṭhadhammanibbānaṁ paññapenti.

디가 니까야 DN 1 범망경 (Brahmajālasutta)

배경

다섯째 견해는 셋째 선정의 행복을 향한 마음 기울임마저 거친 것으로 봅니다. 즐거움·괴로움 두 느낌을 버리고 이전의 기쁨·슬픔 두 마음 상태가 사라진 뒤, 중립 느낌과 평정·알아차림의 청정으로 넷째 선정을 밝힙니다. 선정의 가장 미세한 평정도 자아의 영원한 최종 상태로 붙잡으면 다섯째 견해가 됩니다. 쾌고를 떠난 평정도 최종 자아라는 매력적인 표지가 될 수 있어, 거친 집착을 놓은 뒤의 미세한 취착까지 드러냅니다.

묵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깨끗한 평정은 어떤 매력을 지니나요? 그 고요를 밀어내지 않으면서도 “영원한 나의 상태”라고 이름 붙이는 움직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행복을 향한 마음의 기울임까지 거칠다고 보고 즐거움·괴로움·기쁨·슬픔을 놓으면 무엇이 “최상”으로 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