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몸과 마음을 자아로 보는 견해가 생깁니까?”
“배우지 못한 평범한 사람은 성스러운 이들과 참된 이들을
보지 못했고, 그들의 가르침을 익히지도 훈련받지도 못했느니라.
그는 물질을 자아로 보고, 자아가 물질을 지녔다고 보며,
물질이 자아 안에 있거나 자아가 물질 안에 있다고 보느니라.”
“Kathaṁ pana, bhante, sakkāyadiṭṭhi hotī”ti? “Idha, bhikkhu, assutavā puthujjano ariyānaṁ adassāvī ariyadhammassa akovido ariyadhamme avinīto sappurisānaṁ adassāvī sappurisadhammassa akovido sappurisadhamme avinīto rūpaṁ attato samanupassati rūpavantaṁ vā attānaṁ attani vā rūpaṁ rūpasmiṁ vā attānaṁ;
맛지마 니까야 MN 109 보름밤에 관한 긴 경 (Mahāpuṇṇamasutta) 배경
자아 견해는 단지 “자아가 있다”는 한 문장으로만 생기지 않습니다. 배우고 훈련할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은 물질과 자아를 네 방식으로 연결합니다. 물질 자체를 자아라고 여기거나, 자아가 물질을 소유한다고 여기거나, 물질이 자아 안에 또는 자아가 물질 안에 있다고 봅니다. 부처님은 그 사람을 본질적으로 나쁘다고 규정하지 않고, 성스러운 이와 참된 이의 가르침을 보고 익히고 훈련하지 못한 상태라고 설명하십니다. 견해가 배움과 관찰로 달라질 수 있음을 열어 둡니다.
묵상
몸의 모습이나 상태를 곧 나 자신이라고 여기거나 내 소유물처럼 통제하려 하나요? 물질과 자아를 연결하는 네 방식 가운데 내 생각에 가장 익숙한 것은 무엇이며, 그 관계는 몸을 돌보는 선택에 어떤 영향을 주나요?
“그는 느낌·인식·의지적 형성·의식을 각각
자아로 보거나, 자아가 그것을 지녔다고 보며,
그것이 자아 안에 있거나 자아가 그것 안에 있다고 보느니라.
이와 같이 몸과 마음을 자아로 보는 견해가 생기느니라.”
vedanaṁ attato samanupassati vedanāvantaṁ vā attānaṁ attani vā vedanaṁ vedanāya vā attānaṁ; saññaṁ attato samanupassati saññāvantaṁ vā attānaṁ attani vā saññaṁ saññāya vā attānaṁ; saṅkhāre attato samanupassati saṅkhāravantaṁ vā attānaṁ attani vā saṅkhāre saṅkhāresu vā attānaṁ; viññāṇaṁ attato samanupassati viññāṇavantaṁ vā attānaṁ attani vā viññāṇaṁ viññāṇasmiṁ vā attānaṁ. Evaṁ kho, bhikkhu, sakkāyadiṭṭhi hotī”ti.
맛지마 니까야 MN 109 보름밤에 관한 긴 경 (Mahāpuṇṇamasutta) 배경
물질에 적용한 네 가지 방식은 느낌·인식·의지 작용·의식에도 각각 되풀이됩니다. 기분을 곧 나라고 여기고, 생각이나 의식을 내가 소유한다고 여기며, 그것들이 내 안에 있거나 내가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 무더기 각각에 이 네 관계가 하나씩 온전히 적용됩니다. 이렇게 보면 자아 견해는 하나가 아니라 다섯 무더기마다 네 방식, 모두 스무 가지로 펼쳐집니다. 익숙한 자기 설명이 어느 관계를 사용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습니다.
묵상
기분이나 생각이 바뀌면 내가 무너진 것처럼 느끼나요? 느낌·인식·의지·의식을 자아와 연결하는 네 방식 중 하나를 알아차린다면, 그 경험을 소유하거나 밀어내지 않고 어떻게 다르게 곁에 머물 수 있을까요?
“어떻게 몸과 마음을 자아로 보는 견해가 생기지 않습니까?”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성스러운 이들과 참된 이들을 보았고,
그 가르침을 익혀 잘 훈련되었느니라.
그는 물질을 자아로 보지 않고, 자아가 물질을 지녔다고도,
물질이 자아 안에 또는 자아가 물질 안에 있다고도 보지 않느니라.”
“Kathaṁ pana, bhante, sakkāyadiṭṭhi na hotī”ti? “Idha, bhikkhu, sutavā ariyasāvako ariyānaṁ dassāvī ariyadhammassa kovido ariyadhamme suvinīto sappurisānaṁ dassāvī sappurisadhammassa kovido sappurisadhamme suvinīto na rūpaṁ attato samanupassati na rūpavantaṁ vā attānaṁ na attani vā rūpaṁ na rūpasmiṁ vā attānaṁ;
맛지마 니까야 MN 109 보름밤에 관한 긴 경 (Mahāpuṇṇamasutta) 배경
반대의 길은 네 관계를 하나만 부정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성스러운 이와 참된 이를 보고, 그 가르침을 익히며 잘 훈련되었습니다. 그 결과 물질을 자아로 보지 않고, 자아가 물질을 소유한다고도 보지 않으며, 물질과 자아가 서로의 안에 있다고도 보지 않습니다. 그는 네 관계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부정하여, 물질과 자아 사이의 소유와 포함 관계까지 놓습니다.
묵상
몸을 자아라고 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내 것이며 내 안에 있다고 단단히 붙드나요? 자아·소유·서로의 안이라는 네 관계를 하나씩 살펴보면 아직 남아 있는 소유의 방식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긴장을 만드나요?
“그는 느낌·인식·의지적 형성·의식을 각각
자아로 보지 않고, 자아가 그것을 지녔다고도 보지 않으며,
그것이 자아 안에 또는 자아가 그것 안에 있다고도 보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몸과 마음을 자아로 보는 견해가 생기지 않느니라.”
na vedanaṁ attato samanupassati na vedanāvantaṁ vā attānaṁ na attani vā vedanaṁ na vedanāya vā attānaṁ; na saññaṁ attato samanupassati na saññāvantaṁ vā attānaṁ na attani vā saññaṁ na saññāya vā attānaṁ; na saṅkhāre attato samanupassati na saṅkhāravantaṁ vā attānaṁ na attani vā saṅkhāre na saṅkhāresu vā attānaṁ; na viññāṇaṁ attato samanupassati na viññāṇavantaṁ vā attānaṁ na attani vā viññāṇaṁ na viññāṇasmiṁ vā attānaṁ. Evaṁ kho, bhikkhu, sakkāyadiṭṭhi na hotī”ti.
맛지마 니까야 MN 109 보름밤에 관한 긴 경 (Mahāpuṇṇamasutta) 배경
느낌·인식·의지 작용·의식에서도 네 가지 부정이 각각 온전히 이어집니다. 어떤 느낌을 곧 나라고 하지 않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내가 그것을 소유한다거나 서로의 안에 들어 있다고 보는 관계도 내려놓습니다. 이 대목은 경험을 없애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느낌은 느껴지고 인식과 의지는 작동하며 의식도 일어나지만, 그 과정에 영속적인 자아를 끼워 넣지 않습니다. 배움은 삶에서 경험을 빼는 일이 아니라 경험을 자아로 굳히지 않는 보는 법을 익히는 일입니다.
묵상
생각이나 의식을 자아가 아니라고 이해하면서도 은밀히 내 것이라고 붙들고 있나요? 경험은 그대로 일어나되 자아·소유·안팎의 네 관계를 더하지 않는다면, 몸의 긴장과 다음 선택에서 무엇이 가벼워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