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과 위험과 벗어남

각 무더기가 주는 만족과 변하는 위험, 욕구와 탐욕을 버리는 벗어남을 함께 봅니다.

“세존이시여, 물질에는 어떤 만족과 위험과 벗어남이 있습니까? 느낌과 인식에는 어떤 만족과 위험과 벗어남이 있으며, 의지적 형성과 의식에는 각각 어떤 만족과 위험과 벗어남이 있습니까?”

“Ko nu kho, bhante, rūpe assādo, ko ādīnavo, kiṁ nissaraṇaṁ? Ko vedanāya assādo, ko ādīnavo, kiṁ nissaraṇaṁ? Ko saññāya assādo, ko ādīnavo, kiṁ nissaraṇaṁ? Ko saṅkhāresu assādo, ko ādīnavo, kiṁ nissaraṇaṁ? Ko viññāṇe assādo, ko ādīnavo, kiṁ nissaraṇan”ti?

맛지마 니까야 MN 109 보름밤에 관한 긴 경 (Mahāpuṇṇamasutta)

배경

수행자는 다섯 무더기를 무조건 버려야 할 대상으로 단정하지 않고 세 측면을 함께 묻습니다. 무엇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만족인지, 붙잡을 때 어떤 위험이 있는지, 그 관계에서 어떻게 벗어나는지를 물질·느낌·인식·의지 작용·의식마다 확인합니다. 만족을 보지 않으면 왜 집착하는지 이해하기 어렵고, 위험을 보지 않으면 놓을 이유가 흐려집니다. 벗어남까지 보아야 비판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세 항목을 다섯 무더기 모두에 적용하는 것이 뒤의 답을 정확히 이해하는 토대입니다.

묵상

어떤 경험을 좋거나 나쁘다는 한 면으로만 판단하나요? 그것이 주는 만족과 변할 때의 위험, 욕구와 탐욕을 버려 붙들지 않을 가능성을 함께 본다면 지금의 선택과 기대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물질에 기대어 생기는 즐거움과 기쁨이 물질의 만족이니라. 물질은 무상하고 괴로우며 변하는 성질을 지녔으니, 이것이 물질의 위험이니라. 물질을 향한 욕구와 탐욕을 없애고 버리는 것이 물질에서 벗어나는 길이니라.”

“Yaṁ kho, bhikkhu, rūpaṁ paṭicca uppajjati sukhaṁ somanassaṁ, ayaṁ rūpe assādo. Yaṁ rūpaṁ aniccaṁ dukkhaṁ vipariṇāmadhammaṁ, ayaṁ rūpe ādīnavo. Yo rūpe chandarāgavinayo chandarāgappahānaṁ, idaṁ rūpe nissaraṇaṁ.

맛지마 니까야 MN 109 보름밤에 관한 긴 경 (Mahāpuṇṇamasu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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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의 만족은 몸과 대상에 기대어 생기는 즐거움과 기쁨입니다. 부처님은 그 즐거움이 없다고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물질은 영원하지 않고 변하므로 붙들면 괴로움이 된다는 위험을 함께 밝히십니다. 벗어남은 물질을 파괴하거나 몸을 미워하는 일이 아니라, 물질을 향한 욕구와 탐욕을 없애고 버리는 것입니다. 만족·위험·벗어남은 원인과 결과의 흐름을 이룹니다. 끌림을 인정하고 변화의 성질을 본 뒤, 붙드는 관계를 놓는 길입니다.

묵상

몸이나 물건이 주는 즐거움을 부정해야만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만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무상하고 변한다는 위험을 함께 본다면, 몸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욕구와 탐욕을 덜 보태는 길은 무엇인가요?

“느낌·인식·의지적 형성·의식에도 각각 그것에 기대어 생기는 즐거움과 기쁨이라는 만족, 무상하고 괴로우며 변하는 성질이라는 위험, 그것을 향한 욕구와 탐욕을 없애고 버리는 벗어남이 있느니라.”

Yaṁ kho, bhikkhu, vedanaṁ paṭicca … saññaṁ paṭicca … saṅkhāre paṭicca … viññāṇaṁ paṭicca uppajjati sukhaṁ somanassaṁ, ayaṁ viññāṇe assādo. Yaṁ viññāṇaṁ aniccaṁ dukkhaṁ vipariṇāmadhammaṁ, ayaṁ viññāṇe ādīnavo. Yo viññāṇe chandarāgavinayo chandarāgappahānaṁ, idaṁ viññāṇe nissaraṇan”ti.

맛지마 니까야 MN 109 보름밤에 관한 긴 경 (Mahāpuṇṇamasu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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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인식·의지 작용·의식 각각에도 만족·위험·벗어남의 세 측면이 온전히 적용됩니다. 느낌이나 생각이 주는 즐거움은 만족이고, 그것들이 무상하고 괴로우며 변한다는 사실은 위험입니다. 대상 자체를 억누르는 대신 그에 대한 욕구와 탐욕을 없애고 버리는 일이 벗어남입니다. 네 항목 중 어느 하나도 빠뜨리지 않아야 마음의 경험도 물질과 같은 원리로 볼 수 있습니다.

묵상

좋은 느낌이나 선명한 생각이 오래가야 한다고 붙들고 있나요? 그 만족과 무상·괴로움·변화의 위험을 함께 보며 욕구와 탐욕만 놓는다면, 경험을 억누르지 않고도 어떤 자유와 여유가 가능할까요?

“어떻게 알고 보아야 이 의식 있는 몸과 바깥의 모든 표상에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여기는 마음과 자만의 잠재 성향이 없게 됩니까?” “과거·미래·현재, 안·밖, 거침·미세함, 열등·뛰어남, 멂·가까움의 모든 물질과 느낌을 바른 지혜로 보라.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나는 이것이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Kathaṁ pana, bhante, jānato kathaṁ passato imasmiñca saviññāṇake kāye bahiddhā ca sabbanimittesu ahaṅkāramamaṅkāramānānusayā na hontī”ti? “Yaṁ kiñci, bhikkhu, rūpaṁ—atītānāgatapaccuppannaṁ ajjhattaṁ vā bahiddhā vā oḷārikaṁ vā sukhumaṁ vā hīnaṁ vā paṇītaṁ vā yaṁ dūre santike vā—sabbaṁ rūpaṁ ‘netaṁ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evametaṁ yathābhūtaṁ sammappaññāya passati. Yā kāci vedanā …

맛지마 니까야 MN 109 보름밤에 관한 긴 경 (Mahāpuṇṇamasu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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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이 의식 있는 몸과 바깥의 모든 표상에서 “나”와 “내 것”을 만들고 자만하는 잠재 성향이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묻습니다. 답은 모든 물질과 느낌을 시간·안팎·성질·거리의 온 범위에서 보고, 세 문장으로 관계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느낌도 물질과 마찬가지로 이 전체 범위에서 세 관계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내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라는 세 부정은 소유·동일시·실체화를 각각 겨냥합니다.

묵상

몸이나 느낌을 두고 내 것, 나, 나의 본질이라는 세 생각을 한꺼번에 보탠 적이 있나요? 소유·동일시·실체화의 셋을 하나씩 구별해 부정해 본다면 어느 붙잡음이 먼저 느슨해지고 몸을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모든 인식과 의지적 형성, 의식도 과거·미래·현재에서 멂·가까움까지 온 범위를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하느니라.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나는 이것이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이렇게 알고 볼 때 몸과 바깥의 모든 인식에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여기는 마음과 자만의 잠재 성향이 없느니라.”

yā kāci saññā … ye keci saṅkhārā … yaṁ kiñci viññāṇaṁ—atītānāgatapaccuppannaṁ ajjhattaṁ vā bahiddhā vā oḷārikaṁ vā sukhumaṁ vā hīnaṁ vā paṇītaṁ vā yaṁ dūre santike vā—sabbaṁ viññāṇaṁ ‘netaṁ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evametaṁ yathābhūtaṁ sammappaññāya passati. Evaṁ kho, bhikkhu, jānato evaṁ passato imasmiñca saviññāṇake kāye bahiddhā ca sabbanimittesu ahaṅkāramamaṅkāramānānusayā na hontī”ti.

맛지마 니까야 MN 109 보름밤에 관한 긴 경 (Mahāpuṇṇamasu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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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과 의지 작용, 의식에도 물질과 느낌에서 밝힌 전체 범위와 세 부정이 이어집니다. 인식과 의지 작용도 과거·미래·현재부터 멂·가까움까지 같은 범위에서 보아야 합니다. 결론은 이 보는 법이 의식 있는 몸과 바깥의 모든 표상에서 나 만들기, 내 것 만들기, 자만의 잠재 성향을 없앤다는 것입니다. 자만은 겉으로 우월하다고 말할 때만이 아니라 경험을 “나”로 만드는 미세한 습관에도 숨어 있습니다.

묵상

생각과 의식을 나라고 부르지 않으면서도 내 능력이나 지위의 근거로 삼고 있나요? 내 것·나·나의 자아가 아니라는 세 부정을 온 범위에 적용한다면, 자만이 조용히 기대고 있던 자리는 관계와 선택에서 어떻게 드러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