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진리에서 해야 할 일

네 진리를 각각 알고, 버리고, 실현하고, 닦는 세 전환의 앎

“‘이것이 괴로움에 대한 거룩한 진리다.’ 수행자들이여, 전에 들어 본 적 없던 이 사실에 대해 내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빤냐)가 생겨났고, 밝은 앎(윗자)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

‘Idaṁ dukkhaṁ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ṁ udapādi, ñāṇaṁ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전법륜경 (Dhammacakkappavattanasutta)

배경

세 차례 가운데 먼저 진리의 내용을 아는 문장입니다. 괴로움에 관한 앎은 세 차례로 나뉩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라는 진리임을 아는 일,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는 할 일을 아는 일, 그렇게 알았음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세 차례마다 보는 눈, 앎, 지혜, 밝은 앎, 빛이 생겼다는 다섯 표현이 되풀이됩니다. 이 반복에서 달라지는 것은 괴로움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괴로움에 붙는 일은 버리기가 아니라 속속들이 알기입니다. 완성을 말하는 문장도 가르침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상태를 당장 이루라고 요구하는 말이 아니라, 말하는 이 자신의 앎을 밝히는 문장입니다.

묵상

“괴로움은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는 문장을 읽을 때, 없애려는 마음과 알아보려는 마음은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나요? 지금의 괴로움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어렵다면 건너뛰어도 괜찮아요. 이 카드에서 오래 남는 한 표현은 무엇인가요?

“‘이 거룩한 진리가 가리키는 괴로움은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전에 들어 본 적 없던 이 사실에 대해 내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밝은 앎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

‘Taṁ kho panidaṁ dukkhaṁ ariyasaccaṁ pariññeyyan’ti me, bhikkhave, pubbe …pe… udapād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전법륜경 (Dhammacakkappavattanasutta)

배경

세 차례 가운데 그 진리에 대해 해야 할 일을 아는 문장입니다. 괴로움에 관한 앎은 세 차례로 나뉩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라는 진리임을 아는 일,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는 할 일을 아는 일, 그렇게 알았음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세 차례마다 보는 눈, 앎, 지혜, 밝은 앎, 빛이 생겼다는 다섯 표현이 되풀이됩니다. 이 반복에서 달라지는 것은 괴로움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괴로움에 붙는 일은 버리기가 아니라 속속들이 알기입니다. 완성을 말하는 문장도 가르침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상태를 당장 이루라고 요구하는 말이 아니라, 말하는 이 자신의 앎을 밝히는 문장입니다.

묵상

“괴로움은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는 문장을 읽을 때, 없애려는 마음과 알아보려는 마음은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나요? 지금의 괴로움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어렵다면 건너뛰어도 괜찮아요. 이 카드에서 오래 남는 한 표현은 무엇인가요?

“‘이 거룩한 진리가 가리키는 괴로움을 속속들이 알았다.’ 수행자들이여, 전에 들어 본 적 없던 이 사실에 대해 내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밝은 앎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

‘Taṁ kho panidaṁ dukkhaṁ ariyasaccaṁ pariññāt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ṁ udapādi, ñāṇaṁ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전법륜경 (Dhammacakkappavattanasutta)

배경

세 차례 가운데 그 일을 마쳤음을 확인하는 문장입니다. 괴로움에 관한 앎은 세 차례로 나뉩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라는 진리임을 아는 일,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는 할 일을 아는 일, 그렇게 알았음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세 차례마다 보는 눈, 앎, 지혜, 밝은 앎, 빛이 생겼다는 다섯 표현이 되풀이됩니다. 이 반복에서 달라지는 것은 괴로움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괴로움에 붙는 일은 버리기가 아니라 속속들이 알기입니다. 완성을 말하는 문장도 가르침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상태를 당장 이루라고 요구하는 말이 아니라, 말하는 이 자신의 앎을 밝히는 문장입니다.

묵상

“괴로움은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는 문장을 읽을 때, 없애려는 마음과 알아보려는 마음은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나요? 지금의 괴로움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어렵다면 건너뛰어도 괜찮아요. 이 카드에서 오래 남는 한 표현은 무엇인가요?

“‘이것이 괴로움이 생겨나는 원인에 대한 거룩한 진리다.’ 수행자들이여, 전에 들어 본 적 없던 이 사실에 대해 내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밝은 앎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

‘Idaṁ dukkhasamudayaṁ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ṁ udapādi, ñāṇaṁ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전법륜경 (Dhammacakkappavattanasutta)

배경

세 차례 가운데 먼저 진리의 내용을 아는 문장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에 대해서도 진리의 내용, 해야 할 일, 마친 일이라는 세 차례가 이어집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을 나타내는 말은 속속들이 알기에서 버리기로 바뀝니다. 앞에서 괴로움의 원인을 갈망이라고 밝혔으므로, 버리라는 것은 진리가 틀렸다고 부정하거나 괴로움을 겪는 사람을 없애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구별이 드러나도록 본문에서는 진리가 가리키는 원인이라고 풀었습니다. 보는 눈부터 빛까지의 다섯 표현은 그대로 반복되지만, 원인을 아는 일과 그 원인을 버린 일은 분명히 구별됩니다.

묵상

어떤 반응이 되풀이될 때 그 반응 자체보다 그 앞의 원인을 잠깐 본 적이 있나요? 그 원인을 당장 찾아 없애야 한다고 자신을 몰아붙일 필요는 없어요. “이것이다”, “버려야 한다”, “버렸다”라는 세 표현의 차이는 어떻게 들리나요?

“‘이 거룩한 진리가 가리키는 괴로움의 원인은 버려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전에 들어 본 적 없던 이 사실에 대해 내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밝은 앎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

‘Taṁ kho panidaṁ dukkhasamudayaṁ ariyasaccaṁ pahātabban’ti me, bhikkhave, pubbe …pe… udapād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전법륜경 (Dhammacakkappavattanasutta)

배경

세 차례 가운데 그 진리에 대해 해야 할 일을 아는 문장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에 대해서도 진리의 내용, 해야 할 일, 마친 일이라는 세 차례가 이어집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을 나타내는 말은 속속들이 알기에서 버리기로 바뀝니다. 앞에서 괴로움의 원인을 갈망이라고 밝혔으므로, 버리라는 것은 진리가 틀렸다고 부정하거나 괴로움을 겪는 사람을 없애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구별이 드러나도록 본문에서는 진리가 가리키는 원인이라고 풀었습니다. 보는 눈부터 빛까지의 다섯 표현은 그대로 반복되지만, 원인을 아는 일과 그 원인을 버린 일은 분명히 구별됩니다.

묵상

어떤 반응이 되풀이될 때 그 반응 자체보다 그 앞의 원인을 잠깐 본 적이 있나요? 그 원인을 당장 찾아 없애야 한다고 자신을 몰아붙일 필요는 없어요. “이것이다”, “버려야 한다”, “버렸다”라는 세 표현의 차이는 어떻게 들리나요?

“‘이 거룩한 진리가 가리키는 괴로움의 원인을 버렸다.’ 수행자들이여, 전에 들어 본 적 없던 이 사실에 대해 내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밝은 앎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

‘Taṁ kho panidaṁ dukkhasamudayaṁ ariyasaccaṁ pahīn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ṁ udapādi, ñāṇaṁ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전법륜경 (Dhammacakkappavattanasutta)

배경

세 차례 가운데 그 일을 마쳤음을 확인하는 문장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에 대해서도 진리의 내용, 해야 할 일, 마친 일이라는 세 차례가 이어집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을 나타내는 말은 속속들이 알기에서 버리기로 바뀝니다. 앞에서 괴로움의 원인을 갈망이라고 밝혔으므로, 버리라는 것은 진리가 틀렸다고 부정하거나 괴로움을 겪는 사람을 없애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구별이 드러나도록 본문에서는 진리가 가리키는 원인이라고 풀었습니다. 보는 눈부터 빛까지의 다섯 표현은 그대로 반복되지만, 원인을 아는 일과 그 원인을 버린 일은 분명히 구별됩니다.

묵상

어떤 반응이 되풀이될 때 그 반응 자체보다 그 앞의 원인을 잠깐 본 적이 있나요? 그 원인을 당장 찾아 없애야 한다고 자신을 몰아붙일 필요는 없어요. “이것이다”, “버려야 한다”, “버렸다”라는 세 표현의 차이는 어떻게 들리나요?

“‘이것이 괴로움의 멎음에 대한 거룩한 진리다.’ 수행자들이여, 전에 들어 본 적 없던 이 사실에 대해 내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밝은 앎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

‘Idaṁ dukkhanirodhaṁ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ṁ udapādi, ñāṇaṁ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전법륜경 (Dhammacakkappavattanasutta)

배경

세 차례 가운데 먼저 진리의 내용을 아는 문장입니다. 괴로움이 멎는 일에서는 몸소 겪어 안다는 말이 중심에 놓입니다. 멎음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해하는 일, 그것을 몸소 알아야 한다는 일을 아는 것, 몸소 알았다고 확인하는 것은 같은 문장이 아닙니다. 이 경은 앞에서 멎음을 바로 그 갈망이 남김없이 사그라지고 멎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경험도 그 앞의 정의와 연결해 읽어야 합니다. 눈·앎·지혜·밝은 앎·빛이라는 후렴은 이 세 차례에 똑같이 붙습니다. 이 구별을 읽는 일이 특별한 경험이나 자신의 성취를 증명하는 시험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묵상

“멎음을 안다”와 “멎음을 몸소 겪어 안다”는 두 표현을 나란히 읽을 때 어떤 차이가 느껴지나요? 직접 답을 만들거나 특별한 체험을 떠올릴 필요는 없어요. 세 문장 가운데 지금 마음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 거룩한 진리가 가리키는 괴로움의 멎음은 몸소 겪어 알아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전에 들어 본 적 없던 이 사실에 대해 내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밝은 앎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

‘Taṁ kho panidaṁ dukkhanirodhaṁ ariyasaccaṁ sacchikātabban’ti me, bhikkhave, pubbe …pe… udapād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전법륜경 (Dhammacakkappavattanasutta)

배경

세 차례 가운데 그 진리에 대해 해야 할 일을 아는 문장입니다. 괴로움이 멎는 일에서는 몸소 겪어 안다는 말이 중심에 놓입니다. 멎음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해하는 일, 그것을 몸소 알아야 한다는 일을 아는 것, 몸소 알았다고 확인하는 것은 같은 문장이 아닙니다. 이 경은 앞에서 멎음을 바로 그 갈망이 남김없이 사그라지고 멎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경험도 그 앞의 정의와 연결해 읽어야 합니다. 눈·앎·지혜·밝은 앎·빛이라는 후렴은 이 세 차례에 똑같이 붙습니다. 이 구별을 읽는 일이 특별한 경험이나 자신의 성취를 증명하는 시험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묵상

“멎음을 안다”와 “멎음을 몸소 겪어 안다”는 두 표현을 나란히 읽을 때 어떤 차이가 느껴지나요? 직접 답을 만들거나 특별한 체험을 떠올릴 필요는 없어요. 세 문장 가운데 지금 마음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 거룩한 진리가 가리키는 괴로움의 멎음을 몸소 겪어 알았다.’ 수행자들이여, 전에 들어 본 적 없던 이 사실에 대해 내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밝은 앎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

‘Taṁ kho panidaṁ dukkhanirodhaṁ ariyasaccaṁ sacchikat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ṁ udapādi, ñāṇaṁ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전법륜경 (Dhammacakkappavattanasutta)

배경

세 차례 가운데 그 일을 마쳤음을 확인하는 문장입니다. 괴로움이 멎는 일에서는 몸소 겪어 안다는 말이 중심에 놓입니다. 멎음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해하는 일, 그것을 몸소 알아야 한다는 일을 아는 것, 몸소 알았다고 확인하는 것은 같은 문장이 아닙니다. 이 경은 앞에서 멎음을 바로 그 갈망이 남김없이 사그라지고 멎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경험도 그 앞의 정의와 연결해 읽어야 합니다. 눈·앎·지혜·밝은 앎·빛이라는 후렴은 이 세 차례에 똑같이 붙습니다. 이 구별을 읽는 일이 특별한 경험이나 자신의 성취를 증명하는 시험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묵상

“멎음을 안다”와 “멎음을 몸소 겪어 안다”는 두 표현을 나란히 읽을 때 어떤 차이가 느껴지나요? 직접 답을 만들거나 특별한 체험을 떠올릴 필요는 없어요. 세 문장 가운데 지금 마음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것이 괴로움이 멎도록 이끄는 실천의 길에 대한 거룩한 진리다.’ 수행자들이여, 전에 들어 본 적 없던 이 사실에 대해 내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밝은 앎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

‘Idaṁ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ṁ udapādi, ñāṇaṁ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전법륜경 (Dhammacakkappavattanasutta)

배경

세 차례 가운데 먼저 진리의 내용을 아는 문장입니다. 마지막으로 괴로움이 멎도록 이끄는 길에도 같은 세 차례가 적용됩니다. 이 길이 무엇인지 알고, 닦아야 한다는 일을 알고, 닦았음을 확인하는 순서입니다. 길은 앞서 열거한 여덟 갈래의 실천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닦는다는 것은 도로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 실천을 익히고 발전시키는 뜻입니다. 이로써 괴로움은 속속들이 알기, 원인은 버리기, 멎음은 몸소 겪어 알기, 길은 닦기라는 서로 다른 일이 갖추어집니다. 같은 후렴이 반복된다고 해서 네 진리에 붙는 일을 모두 하나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묵상

길을 “안다”, “닦아야 한다”, “닦았다”는 세 표현을 읽을 때 각각의 무게가 어떻게 다르게 들리나요? 자신의 수행을 평가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여덟 갈래 가운데 오늘 한 번 기억해 두고 싶은 낱말은 무엇인가요?

“‘이 거룩한 진리가 가리키는 길, 곧 괴로움이 멎도록 이끄는 길은 닦아야 한다.’ 수행자들이여, 전에 들어 본 적 없던 이 사실에 대해 내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밝은 앎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

‘Taṁ kho panidaṁ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ṁ bhāvetabban’ti me, bhikkhave, pubbe …pe… udapād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전법륜경 (Dhammacakkappavattanasutta)

배경

세 차례 가운데 그 진리에 대해 해야 할 일을 아는 문장입니다. 마지막으로 괴로움이 멎도록 이끄는 길에도 같은 세 차례가 적용됩니다. 이 길이 무엇인지 알고, 닦아야 한다는 일을 알고, 닦았음을 확인하는 순서입니다. 길은 앞서 열거한 여덟 갈래의 실천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닦는다는 것은 도로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 실천을 익히고 발전시키는 뜻입니다. 이로써 괴로움은 속속들이 알기, 원인은 버리기, 멎음은 몸소 겪어 알기, 길은 닦기라는 서로 다른 일이 갖추어집니다. 같은 후렴이 반복된다고 해서 네 진리에 붙는 일을 모두 하나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묵상

길을 “안다”, “닦아야 한다”, “닦았다”는 세 표현을 읽을 때 각각의 무게가 어떻게 다르게 들리나요? 자신의 수행을 평가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여덟 갈래 가운데 오늘 한 번 기억해 두고 싶은 낱말은 무엇인가요?

“‘이 거룩한 진리가 가리키는 길, 곧 괴로움이 멎도록 이끄는 길을 닦았다.’ 수행자들이여, 전에 들어 본 적 없던 이 사실에 대해 내게 보는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밝은 앎이 생겨났고, 빛이 생겨났다.”

‘Taṁ kho panidaṁ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ṁ bhāvit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ṁ udapādi, ñāṇaṁ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전법륜경 (Dhammacakkappavattanasutta)

배경

세 차례 가운데 그 일을 마쳤음을 확인하는 문장입니다. 마지막으로 괴로움이 멎도록 이끄는 길에도 같은 세 차례가 적용됩니다. 이 길이 무엇인지 알고, 닦아야 한다는 일을 알고, 닦았음을 확인하는 순서입니다. 길은 앞서 열거한 여덟 갈래의 실천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닦는다는 것은 도로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 실천을 익히고 발전시키는 뜻입니다. 이로써 괴로움은 속속들이 알기, 원인은 버리기, 멎음은 몸소 겪어 알기, 길은 닦기라는 서로 다른 일이 갖추어집니다. 같은 후렴이 반복된다고 해서 네 진리에 붙는 일을 모두 하나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묵상

길을 “안다”, “닦아야 한다”, “닦았다”는 세 표현을 읽을 때 각각의 무게가 어떻게 다르게 들리나요? 자신의 수행을 평가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여덟 갈래 가운데 오늘 한 번 기억해 두고 싶은 낱말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