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들이여, 나는 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이렇게 세 차례에 걸친 열두 가지 모두에서, 조금의 흐림도 없이 있는 그대로 알고 보기 전까지는,
수행자들이여, 신들(데와)과 마라와 브라흐마가 있는 이 세상에서,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들(사마나)과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들(브라흐마나)을 비롯한 신들과 사람들 앞에서,
‘더없이 높고 바른 온전한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밝히지 않았다.”
Yāvakīvañca me, bhikkhave, imesu catūsu ariyasaccesu evaṁ tiparivaṭṭaṁ dvādasākāraṁ yathābhūtaṁ ñāṇadassanaṁ na suvisuddhaṁ ahosi, neva tāvāhaṁ, bhikkhave,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ṇabrāhmaṇ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uttaraṁ sammāsambodhiṁ abhisambuddho’ti paccaññāsiṁ.
상윳따 니까야 SN 56.11 전법륜경 (Dhammacakkappavattanasutta) 배경
이 문장은 깨달았다고 밝히기 전의 조건을 설명합니다. 네 진리에 각각 세 차례의 앎이 있으므로 모두 열두 가지가 됩니다. 이어지는 두 문장은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일이 맑아지기 전과 뒤를 대비합니다. 앞에서는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밝히지 않았고, 뒤에서는 밝혔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두 문장의 신들과 사람들은 같은 세상을 가리킵니다.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들은 브라흐마나를,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들은 사마나를 풀어 쓴 말입니다. 이 대목은 자신이 깨달았다고 말하기 위한 확인을 설명하며,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시간표를 제시하는 구절은 아닙니다.
묵상
같은 열두 가지를 두고 “선언하지 않았다”와 “선언했다”가 갈리는 대목에서 두 문장 사이의 멈춤은 어떻게 느껴지나요? 자신의 성취와 비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 두 문장가 신중함에 관해 무엇을 묻게 하나요?
“그러나 수행자들이여, 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이렇게 세 차례에 걸친 열두 가지 모두에서, 조금의 흐림도 없이 있는 그대로 알고 보게 되었을 때,
수행자들이여, 나는 신들과 마라와 브라흐마가 있는 이 세상에서,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들과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들을 비롯한 신들과 사람들 앞에서,
‘더없이 높고 바른 온전한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나에게 이런 앎과 봄이 생겨났다.”
Yato ca kho me, bhikkhave, imesu catūsu ariyasaccesu evaṁ tiparivaṭṭaṁ dvādasākāraṁ yathābhūtaṁ ñāṇadassanaṁ suvisuddhaṁ ahosi, athāhaṁ, bhikkhave,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ṇabrāhmaṇ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uttaraṁ sammāsambodhiṁ abhisambuddho’ti paccaññāsiṁ. Ñāṇañca pana me dassanaṁ udapād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전법륜경 (Dhammacakkappavattanasutta) 배경
앞의 부정문과 달리, 이 문장은 깨달았다고 밝힌 때를 설명합니다. 네 진리에 각각 세 차례의 앎이 있으므로 모두 열두 가지가 됩니다. 이어지는 두 문장은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일이 맑아지기 전과 뒤를 대비합니다. 앞에서는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밝히지 않았고, 뒤에서는 밝혔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두 문장의 신들과 사람들은 같은 세상을 가리킵니다. 제사를 맡는 계층의 사람들은 브라흐마나를, 집을 떠나 길을 닦는 이들은 사마나를 풀어 쓴 말입니다. 이 대목은 자신이 깨달았다고 말하기 위한 확인을 설명하며,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시간표를 제시하는 구절은 아닙니다.
묵상
같은 열두 가지를 두고 “선언하지 않았다”와 “선언했다”가 갈리는 대목에서 두 문장 사이의 멈춤은 어떻게 느껴지나요? 자신의 성취와 비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 두 문장가 신중함에 관해 무엇을 묻게 하나요?
“‘내가 얻은 풀려남(위뭇띠)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번이 마지막 태어남이다.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
‘akuppā me vimutti, ayamantimā jāti, natthi dāni punabbhavo’”t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전법륜경 (Dhammacakkappavattanasutta) 배경
이 문장은 가르침을 말하는 이 자신에게 생긴 앎입니다. 가르침을 말하는 이의 풀려남에 대한 앎과 듣는 이에게 생긴 이해가 이어지는 대목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풀려남, 마지막 태어남, 다시 태어남이 없음은 앞서 말한 이 자신의 앎입니다. 그 뒤에는 다섯 수행자가 말씀을 기뻐했다고 서술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보는 눈이 생긴 사람으로 따로 이름을 밝힌 이는 꼰단냐입니다. 다섯 사람이 기뻐한 일과 꼰단냐에게 생긴 일을 하나의 성취로 합치지 않아야 합니다. 생겨나는 것과 멎는 것을 짝지은 문장은 그에게 열린 이해의 내용을 드러냅니다.
묵상
다섯 수행자가 기뻐한 장면과 꼰단냐에게 진리를 보는 눈이 생긴 장면은 어떻게 다르게 다가오나요? 어떤 체험을 증명할 필요는 없어요. 오늘 일어났다가 달라지거나 사라진 경험 하나가 있었다면 무엇이었나요?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섯 수행자는 마음이 흡족해져 그분의 말씀을 기뻐했다.
이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존경받는 꼰단냐에게 먼지도 때도 없는, 진리를 보는 눈(담마짝쿠)이 생겨났다.
‘생겨나는 성질을 가진 것은 무엇이든, 모두 멎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Idamavoca bhagavā. Attamanā pañcavaggiyā bhikkhū bhagavato bhāsitaṁ abhinandunti. Imasmiñca pana veyyākaraṇasmiṁ bhaññamāne āyasmato koṇḍaññassa virajaṁ vītamalaṁ dhammacakkhuṁ udapādi: “yaṁ kiñci samudayadhammaṁ sabbaṁ taṁ nirodhadhamman”t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전법륜경 (Dhammacakkappavattanasutta) 배경
말씀이 끝난 뒤 듣는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을 서술합니다. 가르침을 말하는 이의 풀려남에 대한 앎과 듣는 이에게 생긴 이해가 이어지는 대목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풀려남, 마지막 태어남, 다시 태어남이 없음은 앞서 말한 이 자신의 앎입니다. 그 뒤에는 다섯 수행자가 말씀을 기뻐했다고 서술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보는 눈이 생긴 사람으로 따로 이름을 밝힌 이는 꼰단냐입니다. 다섯 사람이 기뻐한 일과 꼰단냐에게 생긴 일을 하나의 성취로 합치지 않아야 합니다. 생겨나는 것과 멎는 것을 짝지은 문장은 그에게 열린 이해의 내용을 드러냅니다.
묵상
다섯 수행자가 기뻐한 장면과 꼰단냐에게 진리를 보는 눈이 생긴 장면은 어떻게 다르게 다가오나요? 어떤 체험을 증명할 필요는 없어요. 오늘 일어났다가 달라지거나 사라진 경험 하나가 있었다면 무엇이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