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짜나여, 이 세상은 대부분
‘있음’과 ‘없음’이라는 둘에 의지하느니라.
세상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이에게는
세상에 대한 ‘없음’이 없고,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이에게는
세상에 대한 ‘있음’이 없느니라.”
“Dvayanissito khvāyaṁ, kaccāna, loko yebhuyyena—atthitañceva natthitañca. Lokasamudayaṁ kho, kaccāna, yathābhūtaṁ sammappaññāya passato yā loke natthitā sā na hoti. Lokanirodhaṁ kho, kaccāna, yathābhūtaṁ sammappaññāya passato yā loke atthitā sā na hoti.
상윳따 니까야 SN 12.15 까짜야나곳따경 (Kaccānagottasutta) 배경
부처님의 답은 세상이 대체로 의지하는 둘을 “있음”과 “없음”으로 정확히 짝지으며 시작합니다. 이어 일어남을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보는 경우에는 세상에 대한 “없음”이 없고, 소멸을 그렇게 보는 경우에는 “있음”이 없다고 각각 부정합니다. 두 문장의 주어와 방향을 뒤바꾸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어남과 소멸을 함께 보는 바른 견해는 어느 한쪽 명제를 절충하는 의견이 아니라, 현상이 조건 따라 나타나고 멎는 모습을 보는 앎입니다.
묵상
어떤 경험을 “완전히 있다”거나 “전혀 없다”고 곧바로 굳혀 말했던 순간이 있나요? 그 경험이 일어나는 모습과 사라지는 모습을 각각 살펴보면 처음의 판단과 무엇이 달라지나요? 지금은 두 모습 중 하나만 보여도 괜찮아요.
“까짜나여, 이 세상은 대부분
다가감과 집착과 고집에 얽매여 있느니라.
그러나 그는 그러한 다가감과 집착, 마음의 고정,
고집의 잠재 성향에 다가가지 않고 취하지 않으며,
‘나의 자아’라고 굳혀 세우지 않느니라.
‘일어나는 것은 오직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이고,
소멸하는 것은 오직 괴로움이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의심하거나 망설이지 않느니라.
그의 앎은 남에게 의존하지 않느니라.
까짜나여, 이만큼으로 바른 견해가 있느니라.”
Upayupādānābhinivesavinibandho khvāyaṁ, kaccāna, loko yebhuyyena. Tañcāyaṁ upayupādānaṁ cetaso adhiṭṭhānaṁ abhinivesānusayaṁ na upeti na upādiyati nādhiṭṭhāti: ‘attā me’ti. ‘Dukkhameva uppajjamānaṁ uppajjati, dukkhaṁ nirujjhamānaṁ nirujjhatī’ti na kaṅkhati na vicikicchati aparapaccayā ñāṇamevassa ettha hoti. Ettāvatā kho, kaccāna, sammādiṭṭhi hoti.
상윳따 니까야 SN 12.15 까짜야나곳따경 (Kaccānagottasutta) 배경
있음과 없음의 둘을 밝힌 뒤, 부처님은 그 둘에 매이는 마음의 작동을 다가감·취착·고집과 얽매임으로 설명하십니다. 바른 견해를 지닌 이는 그 작동에 다가가지도, 취하지도, 마음에 굳혀 세우지도 않으며 “나의 자아”라고 고정하지 않습니다. 이어 일어나는 것과 소멸하는 것을 각각 오직 괴로움의 일어남과 소멸로 알아 의심과 망설임이 없고, 그 앎은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 성립하지 않는다고 결론짓습니다. 여기까지가 질문에 대한 직접 정의입니다.
묵상
생각이나 느낌이 일어났을 때 곧바로 “나” 또는 “나의 것”이라고 굳혀 붙인 적이 있나요? 그 경험을 잠시 “괴로움이 일어나고 소멸하는 과정”으로만 바라본다면 무엇이 달라 보이나요?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그 반응 자체를 살펴볼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