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사왓티에서. 그곳에서 … “수행자들이여, 물질·느낌·인식·의지적 형성·의식은 무상하느니라. 이와 같이 보는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느낌·인식·의지적 형성·의식에 싫증이 나느니라. 싫증이 나면 탐욕이 빛바래고, 탐욕이 빛바래면 해탈하며,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앎이 생기느니라. ‘태어남은 다했고, 청정한 삶은 완성되었으며, 해야 할 일을 마쳤고, 다시 이런 존재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아느니라.”
Evaṁ me sutaṁ—sāvatthiyaṁ. Tatra kho …pe… “rūpaṁ, bhikkhave, aniccaṁ, vedanā aniccā, saññā aniccā, saṅkhārā aniccā, viññāṇaṁ aniccaṁ. Evaṁ passaṁ,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rūpasmimpi nibbindati, vedanāyapi nibbindati, saññāyapi nibbindati, saṅkhāresupi nibbindati, viññāṇasmimpi nibbindati. Nibbindaṁ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ṁ vimuttamiti ñāṇaṁ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ṁ brahmacariyaṁ, kataṁ karaṇīyaṁ, nāparaṁ itthattāyā’ti pajānātī”ti.
상윳따 니까야 SN 22.12 그대로 머물지 않는 것들에 관한 경 (Aniccasutta)배경
전승자의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와 사왓티라는 장소 뒤, 원문은 Tatra kho …pe…로 반복 도입을 줄이고 곧 “수행자들이여”라는 직접 발화로 들어갑니다. 본문은 물질·느낌·인식·의지적 형성·의식의 순서로 다섯 무더기 모두를 무상하다고 밝힙니다. “이와 같이 보는”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같은 다섯 무더기에 차례로 싫증이 나고, 그 싫증은 탐욕의 빛바램, 해탈, 해탈했다는 앎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싫증은 경험을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변하는 무더기에서 영원한 만족을 찾던 매혹이 풀리는 방향입니다. 마지막 네 선언은 태어남·청정한 삶·해야 할 일·다시 돌아옴에 관해 수행의 완결을 확인합니다.
묵상
다섯 무더기가 무상하다는 첫 선언과 싫증·탐욕의 빛바램·해탈·앎이 이어지는 과정 가운데 어느 연결이 가장 천천히 읽히나요? 자신의 성취를 확인하거나 특별한 상태를 만들어야 할 필요는 없어요. 지금은 각 문장이 앞 문장에 어떻게 기대는지만 살펴보아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