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부모에 대한 애착은 버려졌습니다.’라고 답하면 물어야 하느니라. ‘그런데 존자에게 자녀와 배우자에 대한 애착이 있습니까?’ 그가 ‘자녀와 배우자에게 애착이 있습니다.’라고 답하면 말해야 하느니라. ‘벗이여, 존자는 죽기 마련입니다. 존자가 자녀와 배우자에게 애착을 두어도 반드시 죽고, 존자가 자녀와 배우자에게 애착을 두지 않아도 반드시 죽습니다. 존자여, 자녀와 배우자에게 둔 애착을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So ce evaṁ vadeyya: ‘yā me mātāpitūsu apekkhā sā pahīnā’ti, so evamassa vacanīyo: ‘atthi panāyasmato puttadāresu apekkhā’ti? So ce evaṁ vadeyya: ‘atthi me puttadāresu apekkhā’ti, so evamassa vacanīyo: ‘āyasmā kho māriso maraṇadhammo. Sacepāyasmā puttadāresu apekkhaṁ karissati, marissateva; no cepāyasmā puttadāresu apekkhaṁ karissati, marissateva. Sādhāyasmā, yā te puttadāresu apekkhā taṁ pajahā’ti.
상윳따 니까야 SN 55.54 병자 경 (Gilānasutta)배경
부모에 대한 애착이 버려졌다고 답한 뒤, 같은 문답 구조가 자녀와 배우자로 옮겨 갑니다. “puttadāra”의 두 관계를 원문 순서대로 자녀와 배우자로 옮겼고, 질문과 긍정 답변에서도 같은 목록을 되풀이했습니다. 애착이 있든 없든 죽는다는 두 조건과 같은 결과, 마지막 권고까지 부모 대목과 나란히 놓입니다. 이 반복은 가족 관계를 하찮게 만든다는 뜻을 덧붙이지 않고, 죽음의 조건이 관계마다 달라지지 않는다는 경의 논리를 이어 갑니다. 현대 독자에게는 가족 애정을 부정하거나 이별의 슬픔을 서둘러 끝내라는 요구로 적용하지 않습니다.
묵상
자녀와 배우자라는 두 관계가 부모 다음에 놓인 대목을 읽을 때 어떤 느낌이 일어나나요? 가족을 향한 사랑이나 슬픔을 애착이라고 판정하거나 버려야 한다고 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버거우면 이 질문도 건너뛰고, 읽을 수 있다면 두 관계의 이름이 되풀이되는 것만 확인할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