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문이여, 탐욕에 물들고 탐욕에 압도되어 마음을 빼앗기면 자신을 해칠 생각을 하고, 남을 해칠 생각을 하며, 둘 다 해칠 생각을 하고, 마음의 괴로움과 근심을 겪느니라. 탐욕을 버리면 자신을 해칠 생각도 하지 않고, 남을 해칠 생각도 하지 않으며, 둘 다 해칠 생각도 하지 않고, 마음의 괴로움과 근심도 겪지 않느니라. 바라문이여, 이처럼 열반은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있느니라.”
Ratto kho, brāhmaṇa, rāgena abhibhūto pariyādinnacitto attabyābādhāyapi ceteti, parabyābādhāyapi ceteti, ubhayabyābādhāyapi ceteti, cetasikampi dukkhaṁ domanassaṁ paṭisaṁvedeti. Rāge pahīne nevattabyābādhāyapi ceteti, na parabyābādhāyapi ceteti, na ubhayabyābādhāyapi ceteti, na cetasikampi dukkhaṁ domanassaṁ paṭisaṁvedeti. Evampi kho, brāhmaṇa, sandiṭṭhikaṁ nibbānaṁ hoti.
앙굿따라 니까야 AN 3.55 지금 여기의 열반경 (Nibbutasutta)배경
질문에 대한 첫 답으로 탐욕의 있음과 버려짐을 정확히 대칭시킵니다. 탐욕에 물들고 압도되어 마음을 빼앗긴 쪽에서는 자신을 해칠 생각·남을 해칠 생각·둘 다 해칠 생각이라는 세 의도가 같은 순서로 나오고, 마음의 괴로움과 근심을 겪는 네 번째 결과가 따릅니다. 탐욕을 버린 쪽에서는 이 네 항목이 모두 부정됩니다. ‘바라문이여’는 설명의 시작과 결론에 두 번 나오며, 마지막 문장은 이 변화도 열반이 지금 여기에서 보이는 한 방식이라고 답합니다. 판단 기준을 관념이 아니라 의도와 마음에서 확인되는 해침의 유무에 둡니다.
묵상
“자신·남·둘 다”라는 세 범위를 읽을 때 탐욕이 마음을 좁히는 방향이 어떻게 드러나나요? 실제 해침의 경험을 떠올릴 필요는 없어요. 이 대목이 불편하거나 마음의 괴로움과 근심을 살피기 어렵다면 건너뛰어도 괜찮아요. 세 의도와 마음의 결과가 함께 놓였다는 구조만 살펴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