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과 성냄이 있는 마음과 없는 마음을 알다

다른 존재와 사람의 마음을 둘러 알아차리는 직접 앎을 열고, 탐욕과 성냄의 긍정·부정 네 상태를 그대로 압니다.

“그가 원한다면, ‘자기 마음으로 다른 존재와 사람의 마음을 둘러 알아차리기를. 탐욕 있는 마음을 탐욕 있는 마음이라고 알고, 탐욕 없는 마음을 탐욕 없는 마음이라고 알며, 성냄 있는 마음을 성냄 있는 마음이라고 알고, 성냄 없는 마음을 성냄 없는 마음이라고 알기를.’”

So sace ākaṅkhati: ‘parasattānaṁ parapuggalānaṁ cetasā ceto paricca pajāneyyaṁ— sarāgaṁ vā cittaṁ sarāgaṁ cittanti pajāneyyaṁ, vītarāgaṁ vā cittaṁ vītarāgaṁ cittanti pajāneyyaṁ, sadosaṁ vā cittaṁ sadosaṁ cittanti pajāneyyaṁ, vītadosaṁ vā cittaṁ vītadosaṁ cittanti pajāneyyaṁ,

앙굿따라 니까야 AN 5.23 마음의 오염경 (Upakkilesasutta)

배경

세 번째 직접 앎은 자기 마음으로 다른 존재와 사람의 마음을 둘러 알아차리는 일로 시작합니다. 첫 네 상태는 탐욕 있음과 없음, 성냄 있음과 없음의 두 쌍입니다. 원문은 sarāgaṁ cittaṁ을 다시 sarāgaṁ cittanti라고 받아 “탐욕 있는 마음을 탐욕 있는 마음이라고 안다”라고 하고, 나머지 세 상태도 똑같은 구조로 되풀이합니다. 각 상태 이름과 앎의 내용을 네 번 온전히 반복합니다. 긍정 상태만 알아차리거나 반대를 당연히 추론하는 목록이 아니라, 각 상태를 그 상태 그대로 아는 대칭입니다. 다음 대목은 어리석음과 위축·산란의 두 쌍을 이어갑니다.

묵상

탐욕 있음과 없음, 성냄 있음과 없음이라는 두 쌍을 같은 문장으로 되풀이하는 까닭은 무엇처럼 느껴지나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추측하거나 단정할 필요는 없어요. 각 상태를 같은 이름으로 안다는 구조만 살펴봐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