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자시여, 그 견해는 어떻게 생기지 않습니까?” “위사카 벗이여,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성스러운 이와 참된 이를 보았고, 그 가르침을 알아 잘 훈련되었습니다. 그는 물질을 자아로도, 자아가 지닌 것으로도, 서로가 서로 안에 있다고도 보지 않습니다. 느낌을 … 인식을 … 의지적 형성을 … 의식도 같은 네 방식으로 보지 않습니다. 위사카 벗이여, 이렇게 그 견해가 생기지 않습니다.”
“Kathaṁ panāyye, sakkāyadiṭṭhi na hotī”ti? “Idhāvuso visākha, sutavā ariyasāvako, ariyānaṁ dassāvī ariyadhammassa kovido ariyadhamme suvinīto, sappurisānaṁ dassāvī sappurisadhammassa kovido sappurisadhamme suvinīto, na rūpaṁ attato samanupassati, na rūpavantaṁ vā attānaṁ, na attani vā rūpaṁ, na rūpasmiṁ vā attānaṁ. Na vedanaṁ …pe… na saññaṁ … na saṅkhāre …pe… na viññāṇaṁ attato samanupassati, na viññāṇavantaṁ vā attānaṁ, na attani vā viññāṇaṁ, na viññāṇasmiṁ vā attānaṁ. Evaṁ kho, āvuso visākha, sakkāyadiṭṭhi na hotī”ti.
맛지마 니까야 MN 44 교리문답의 짧은 경 (Cūḷavedallasutta)배경
먼저 제시된 긍정 구조가 이 문답에서는 부정으로 정확히 뒤집힙니다.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성스러운 이와 참된 이를 보았고 그 가르침에 능숙하며 잘 훈련되었습니다. 물질을 자아라고 보지 않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자아가 물질을 지닌다는 소유 관계와 서로가 서로 안에 있다는 포함 관계까지 모두 부정합니다. 느낌·인식·의지 작용에는 원문과 같은 생략표가 있고 의식에서 네 부정이 다시 온전히 제시됩니다.
묵상
경험을 자아가 아니라고 이해하면서도 여전히 내 것이라고 단단히 붙들고 있나요? 물질이나 느낌 하나를 골라 자아·소유·안팎의 네 관계를 더하지 않은 채 잠시 바라보면, 경험과 다음 선택 사이에 어떤 여유가 생기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