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자시여, 인식과 느낌의 소멸에 어떻게 듭니까?” “위사카 벗이여, 수행자에게 ‘들겠다’, ‘들고 있다’, ‘들었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미리 그렇게 닦인 마음이 그 상태로 이끕니다.” “존자시여, 들 때 몸·말·마음 가운데 어느 작용이 먼저 소멸합니까?” “위사카 벗이여, 말의 작용, 몸의 작용, 마음의 작용 순서로 소멸합니다.”
“Kathaṁ panāyye,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 hotī”ti? “Na kho, āvuso visākha, saññāvedayitanirodhaṁ samāpajjantassa bhikkhuno evaṁ hoti: ‘ahaṁ saññāvedayitanirodhaṁ samāpajjissan’ti vā, ‘ahaṁ saññāvedayitanirodhaṁ samāpajjāmī’ti vā, ‘ahaṁ saññāvedayitanirodhaṁ samāpanno’ti vā. Atha khvāssa pubbeva tathā cittaṁ bhāvitaṁ hoti yaṁ taṁ tathattāya upanetī”ti. “Saññāvedayitanirodhaṁ samāpajjantassa panāyye, bhikkhuno katame dhammā paṭhamaṁ nirujjhanti—yadi vā kāyasaṅkhāro, yadi vā vacīsaṅkhāro, yadi vā cittasaṅkhāro”ti? “Saññāvedayitanirodhaṁ samāpajjantassa kho, āvuso visākha, bhikkhuno paṭhamaṁ nirujjhati vacīsaṅkhāro, tato kāyasaṅkhāro, tato cittasaṅkhāro”ti.
맛지마 니까야 MN 44 교리문답의 짧은 경 (Cūḷavedallasutta)배경
담마딘나는 수행자가 소멸에 들어가며 미래·현재·완료의 세 시제로 자신이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합니다. 대신 미리 그렇게 닦인 마음이 그 상태로 이끕니다. 이어 위사카가 몸·말·마음의 세 작용 가운데 무엇이 먼저 멎는지 묻자, 말의 작용이 먼저, 몸의 작용이 그다음, 마음의 작용이 마지막이라고 밝힙니다. 세 부정과 세 단계의 순서를 모두 보존해야 의지로 즉석에서 만드는 상태라는 오해를 피할 수 있습니다.
묵상
깊은 고요를 그 순간의 힘으로 억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미리 닦인 마음이 이끈다는 답과 말·몸·마음의 순서를 함께 보면, 결과를 재촉하기보다 평소 익혀야 할 조건은 무엇으로 보이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