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다빠니의 질문과 세존의 답을 그대로 전하다

세존께서 단다빠니의 두 물음과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 가르침에 관한 자신의 짧은 답을 비구들에게 그대로 되풀이하십니다.

“그는 ‘수행자의 교설은 무엇이며, 무엇을 가르칩니까?’라고 물었느니라. 수행자들이여, 나는 단다빠니에게 이렇게 답했느니라. ‘벗이여, 나의 가르침은 신과 마라와 범천, 수행자와 바라문, 신과 인간이 있는 세상에서 누구와도 다투지 않습니다. 감각적 욕망에서 떨어져 머물고, 의심이 없고 후회를 끊었으며, 이 존재와 저 존재에 대한 갈애를 벗어난 그 바라문에게 인식들이 잠재하지 않습니다. 벗이여, 나는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가르칩니다.’”

‘kiṁvādī samaṇo kimakkhāyī’ti? Evaṁ vutte, ahaṁ, bhikkhave, daṇḍapāṇiṁ sakkaṁ etadavocaṁ: ‘yathāvādī kho, āvuso,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ṇabrāhmaṇ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na kenaci loke viggayha tiṭṭhati, yathā ca pana kāmehi visaṁyuttaṁ viharantaṁ taṁ brāhmaṇaṁ akathaṅkathiṁ chinnakukkuccaṁ bhavābhave vītataṇhaṁ saññā nānusenti—evaṁvādī kho ahaṁ, āvuso, evamakkhāyī’ti.

맛지마 니까야 MN 18 꿀덩어리경 (Madhupiṇḍikasutta)

배경

세존께서는 단다빠니가 한 두 물음과 자신의 답을 줄이지 않고 인용합니다. 보고를 듣는 청자에게는 “수행자들이여”라고 한 번 부르고, 과거 대화 속 단다빠니에게는 “벗이여”라고 답의 시작과 끝에서 두 번 부릅니다. 화자와 청자가 겹치는 인용이므로 이 호격을 섞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구와도 다투지 않음과 갈애에서 벗어난 이에게 지각이 잠재하지 않음이라는 두 축은 처음 답과 같고, 곧 한 수행자가 그 뜻을 더 묻게 됩니다.

묵상

질문과 답을 다른 청자 앞에서 그대로 되풀이하는 장면을 읽을 때, 말의 책임이 어떻게 느껴지나요? 내가 옮기는 말에서 원래 화자와 청자를 지금 구분해 볼 수 있는 한 문장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