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땅을 비우고 무한한 공간의 하나됨에 들다

숲과 땅의 인식을 두지 않고 무한한 공간의 영역 인식에 마음을 모아, 두 동요의 부재와 현재 남은 정도를 압니다.

“또한 아난다여, 수행자는 숲 인식을 마음에 두지 않고 땅 인식도 마음에 두지 않으며, 무한한 공간의 영역 인식에 의지한 하나됨에 마음을 두느니라. 그 마음은 그 인식으로 향하고 맑아지고 자리 잡고 확고해지느니라. 그는 이렇게 아느니라. ‘숲 인식에 의지한 동요는 여기에 없습니다. 땅 인식에 의지한 동요도 여기에 없습니다. 다만 무한한 공간의 영역 인식에 의지한 하나됨이라는 이 정도 동요만 있습니다.’”

Puna caparaṁ, ānanda, bhikkhu amanasikaritvā araññasaññaṁ, amanasikaritvā pathavīsaññaṁ, ākāsānañcāyatanasaññaṁ paṭicca manasi karoti ekattaṁ. Tassa ākāsānañcāyatanasaññāya cittaṁ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adhimuccati. So evaṁ pajānāti: ‘ye assu darathā araññasaññaṁ paṭicca tedha na santi, ye assu darathā pathavīsaññaṁ paṭicca tedha na santi, atthi cevāyaṁ darathamattā yadidaṁ—ākāsānañcāyatanasaññaṁ paṭicca ekattan’ti.

맛지마 니까야 MN 121 공에 대한 짧은 경 (Cūḷasuññatasutta)

배경

세 번째 단계는 물질적 지형의 하나됨에서 무한한 공간의 영역 인식으로 옮겨갑니다. 숲과 땅이라는 이전 두 인식에 마음을 두지 않고, 새 인식에서 마음이 네 방식으로 안정됩니다. 이어 두 이전 인식에 따른 동요는 없지만 무한한 공간에 의지한 하나됨의 동요는 남았다고 압니다. 넓고 경계 없어 보이는 경험도 “이 정도 동요”를 지닌 현재 조건으로 명시됩니다. 따라서 공간의 무한함을 절대적 실재나 완전한 해탈로 고정하지 않고 부재와 잔여의 같은 기준으로 봅니다.

묵상

무한한 공간처럼 넓은 인식에도 그에 의지한 작은 동요가 남는다는 말은 어떻게 느껴지나요? 넓게 느껴지는 경험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생겨난 지금의 조건으로만 천천히 볼 여지가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