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아난다여, 수행자는 무한한 공간 인식을 마음에 두지 않고 무한한 의식 인식도 마음에 두지 않으며,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 인식에 의지한 하나됨에 마음을 두느니라. 그 마음은 그 인식으로 향하고 맑아지고 자리 잡고 확고해지느니라. 그는 이렇게 아느니라. ‘무한한 공간 인식에 따른 동요는 없습니다. 무한한 의식 인식에 따른 동요도 없습니다. 다만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 인식에 의지한 하나됨이라는 이 정도 동요만 있습니다.’”
Puna caparaṁ, ānanda, bhikkhu amanasikaritvā ākāsānañcāyatanasaññaṁ, amanasikaritvā viññāṇañcāyatanasaññaṁ, ākiñcaññāyatanasaññaṁ paṭicca manasi karoti ekattaṁ. Tassa ākiñcaññāyatanasaññāya cittaṁ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adhimuccati. So evaṁ pajānāti: ‘ye assu darathā ākāsānañcāyatanasaññaṁ paṭicca tedha na santi, ye assu darathā viññāṇañcāyatanasaññaṁ paṭicca tedha na santi, atthi cevāyaṁ darathamattā yadidaṁ—ākiñcaññāyatanasaññaṁ paṭicca ekattan’ti.
맛지마 니까야 MN 121 공에 대한 짧은 경 (Cūḷasuññatasutta)배경
다섯 번째 단계는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의식의 영역 인식을 모두 마음에 두지 않고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 인식을 택합니다. 마음의 네 움직임과 동요의 부재·잔여 구조는 그대로입니다.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이름과 달리 그 인식에 의지한 하나됨과 그 정도의 동요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일상의 공허감과 동일시하거나 절대적 무로 해석하지 않고, 특정한 집중의 조건으로 읽어야 합니다. 가장 적어 보이는 대상도 공의 기준으로 다시 점검될 단계입니다.
묵상
“아무것도 없음”에도 그 인식에 의지한 하나됨과 동요가 남는다는 말이 어떻게 들리나요? 공허한 기분과 수행의 영역을 같다고 판단하지 않고, 지금은 문장에 드러난 조건만 차분히 살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