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아난다여, 수행자는 아무것도 없음의 인식을 마음에 두지 않고 인식도 비인식도 아닌 인식도 마음에 두지 않으며, 인식 없는 마음의 집중에 의지한 하나됨에 마음을 두느니라. 마음은 그 집중으로 향하고 맑아지고 자리 잡고 확고해지느니라. 그는 이렇게 아느니라. ‘아무것도 없음의 인식에 따른 동요는 없습니다. 인식도 비인식도 아닌 인식에 따른 동요도 없습니다. 다만 이 몸에 의지하고 생명을 조건으로 하는 여섯 감각과 관련된 이 정도 동요만 있습니다.’”
Puna caparaṁ, ānanda, bhikkhu amanasikaritvā ākiñcaññāyatanasaññaṁ, amanasikaritvā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ññaṁ, animittaṁ cetosamādhiṁ paṭicca manasi karoti ekattaṁ. Tassa animitte cetosamādhimhi cittaṁ pakkhandati pasīdati santiṭṭhati adhimuccati. So evaṁ pajānāti: ‘ye assu darathā ākiñcaññāyatanasaññaṁ paṭicca tedha na santi, ye assu darathā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ññaṁ paṭicca tedha na santi, atthi cevāyaṁ darathamattā yadidaṁ—imameva kāyaṁ paṭicca saḷāyatanikaṁ jīvitapaccayā’ti.
맛지마 니까야 MN 121 공에 대한 짧은 경 (Cūḷasuññatasutta)배경
일곱 번째 단계는 아무것도 없음과 인식도 비인식도 아닌 영역의 인식을 마음에 두지 않고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에 의지합니다. 마음의 네 움직임 뒤 두 이전 동요가 없다고 합니다. 이번에 남는 것은 삼매의 하나됨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을 조건으로 이 몸에 의지한 여섯 감각과 관련된 동요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미세한 인식들을 비운 뒤에도 살아 있는 몸의 감각 조건은 남아 있으므로, 표상 없는 삼매를 몸과 생명의 조건까지 사라진 상태로 과장하지 않습니다.
묵상
아주 고요한 삼매에서도 생명에 의존한 몸의 여섯 감각과 관련된 정도는 남는다는 말이 어떻게 들리나요? 지금 몸에서 가장 분명한 감각 하나만 부담 없이 천천히 느껴볼까요, 잘 모르겠다면 건너뛰어도 괜찮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