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숨 쉬지 않는 선정을 닦아보리라.’
악기웨사나여, 그리하여 나는
입과 코로 드나드는 숨을 막았느니라.
입과 코로 드나드는 숨을 막자
귓구멍으로 바람이 빠져나가며 굉장한 소리가 났으니,
마치 대장장이가 풀무를 불 때 나는
굉장한 소리와 같았느니라. …
나의 정진은 물러섬 없이 확고했고
알아차림은 흐트러짐 없이 확립되었으나,
그 괴로운 애씀에 짓눌려
나의 몸은 격동하고 고요하지 못하였느니라.
‘Yannūnāhaṁ appāṇakaṁyeva jhānaṁ jhāyeyyan’ti. So kho ahaṁ, aggivessana, mukhato ca nāsato ca assāsapassāse uparundhiṁ. Tassa mayhaṁ, aggivessana, mukhato ca nāsato ca assāsapassāsesu uparuddhesu kaṇṇasotehi vātānaṁ nikkhamantānaṁ adhimatto saddo hoti. Seyyathāpi nāma kammāragaggariyā dhamamānāya adhimatto saddo hoti … Āraddhaṁ kho pana me, aggivessana, vīriyaṁ hoti asallīnaṁ upaṭṭhitā sati asammuṭṭhā. Sāraddho ca pana me kāyo hoti appaṭippassaddho teneva dukkhappadhānena padhānābhitunnassa sato.
맛지마 니까야 MN 36 대삿짜까경 (Mahāsaccakasutta) 배경
출가한 청년 싯다르타는 곧바로 보리수로 간 것이 아닙니다. 그 사이에 6년이 있었고, 그 6년의 대부분은 고행이었습니다. 당시 인도에는 몸을 괴롭힐수록 정신이 자유로워진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고, 그는 이 믿음을 어중간하게 시험하지 않았습니다. "숨 쉬지 않는 선정"은 말 그대로 호흡을 끊는 수행이었고, 그 결과는 "귓구멍으로 바람이 빠져나가며 굉장한 소리가 났다"는 묘사로 남았습니다. 주목할 곳은 마지막 문장입니다. "나의 정진은 물러섬 없이 확고했고 마음챙김은 흐트러짐 없이 확립되었으나" - 이 길이 실패한 것은 그가 게을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방향이 틀렸을 뿐입니다. 부처님은 자신이 버린 길을 이렇게 정직하게 회고하십니다.
묵상
노력의 양이 아니라 방향이 문제였던 적이 있나요? 더 열심히 하면 될 거라고 믿으며 버틴 시간이 있다면, 그때 부족했던 것은 정말 노력이었을까요?
먹는 것이 너무 적어 나의 팔다리는
마디만 앙상하게 남은 덩굴 줄기처럼 되었느니라. …
먹는 것이 너무 적어,
뱃가죽을 만지려 하면 등뼈가 잡히고
등뼈를 만지려 하면 뱃가죽이 잡혔으니,
뱃가죽이 등뼈에 붙어버린 것이니라.
먹는 것이 너무 적어,
대소변을 보려 하면
그 자리에서 앞으로 고꾸라졌느니라.
먹는 것이 너무 적어,
몸을 달래려고 손으로 팔다리를 문지르면
뿌리가 썩은 털들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느니라.
Seyyathāpi nāma āsītikapabbāni vā kāḷapabbāni vā; evamevassu me aṅgapaccaṅgāni bhavanti tāyevappāhāratāya … So kho ahaṁ, aggivessana, udaracchaviṁ parimasissāmīti piṭṭhikaṇṭakaṁyeva pariggaṇhāmi, piṭṭhikaṇṭakaṁ parimasissāmīti udaracchaviṁyeva pariggaṇhāmi, yāvassu me, aggivessana, udaracchavi piṭṭhikaṇṭakaṁ allīnā hoti tāyevappāhāratāya. So kho ahaṁ, aggivessana, vaccaṁ vā muttaṁ vā karissāmīti tattheva avakujjo papatāmi tāyevappāhāratāya. So kho ahaṁ, aggivessana, imameva kāyaṁ assāsento pāṇinā gattāni anumajjāmi. Tassa mayhaṁ, aggivessana, pāṇinā gattāni anumajjato pūtimūlāni lomāni kāyasmā papatanti tāyevappāhāratāya.
맛지마 니까야 MN 36 대삿짜까경 (Mahāsaccakasutta) 배경
호흡 다음은 음식이었습니다. 그는 한 번에 콩국 한 줌씩만 먹는 데까지 갔습니다. 이 묘사가 특별한 이유는 출처입니다. 후대의 누군가가 스승을 미화하려고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부처님 본인이 담담하게 회고한 자기 기록입니다. "뱃가죽이 등뼈에 붙어버렸다", "대소변을 보려 하면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 여기에는 어떤 신비로움도 없습니다. 굶주려 무너져가는 한 사람의 몸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대목은 감동의 기록이 아니라 실패의 기록으로 읽어야 합니다. 뒤에서 그는 이 모든 것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묵상
스스로를 벌하듯 몰아붙여 본 적 있나요? 잠을 줄이고 끼니를 거르고 자신을 아끼지 않는 그 방식이, 실제로 답을 준 적이 있었나요?
‘과거의 어떤 수행자나 바라문이
스스로를 몰아붙여
격심하고 거칠고 쓰라린 느낌을 겪었다 하더라도
이것이 그 끝이니, 이보다 더한 것은 없었노라. …
그러나 나는 이 쓰라린 고행으로
사람의 경지를 넘어선,
성자에게 어울리는 지와 견의 특별함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깨달음에 이르는 다른 길이 있지 않겠는가?’
‘Ye kho keci atītamaddhānaṁ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opakkamikā dukkhā tibbā kharā kaṭukā vedanā vedayiṁsu, etāvaparamaṁ, nayito bhiyyo … Na kho panāhaṁ imāya kaṭukāya dukkarakārikāya adhigacchāmi uttari manussadhammā alamariyañāṇadassanavisesaṁ. Siyā nu kho añño maggo bodhāyā’ti?
맛지마 니까야 MN 36 대삿짜까경 (Mahāsaccakasutta) 배경
6년의 결론입니다. 먼저 그는 자신이 도달한 지점을 정확히 잽니다. "이것이 그 끝이니,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 누구도 자신보다 더 혹독하게 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다음 문장이 이 경전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얻지 못하였다." 여기서 질문이 바뀝니다. "더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다른 길이 있지 않겠는가"로. 6년을 쏟아부은 방법을 스스로 부정하는 일은 몸을 괴롭히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이미 치른 대가가 클수록 사람은 그 방법을 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묵상
오래 매달린 방법이 틀렸다고 인정하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요? 이미 들인 시간이 아까워서 계속 붙잡고 있는 일이 지금 당신에게도 있나요?
‘나는 기억하노라.
아버지가 일하시던 들에서
시원한 잠부나무 그늘에 앉아,
감각적 욕망을 떠나고 해로운 것들을 떠나,
사유와 숙고가 있고
떠남에서 생긴 희열과 즐거움이 있는
첫 번째 선정에 들어 머물렀던 것을.
그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아니겠는가?’
악기웨사나여, 그 기억을 따라
나에게 앎이 일어났느니라.
‘바로 이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
‘어찌하여 나는 그 즐거움을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감각적 욕망과도 상관없고
해로운 것들과도 상관없는 즐거움이 아닌가.’
‘Abhijānāmi kho panāhaṁ pitu sakkassa kammante sītāya jambucchāyāya nisinno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ṁ savicāraṁ vivekajaṁ pītisukhaṁ paṭham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itā. Siyā nu kho eso maggo bodhāyā’ti? Tassa mayhaṁ, aggivessana, satānusāri viññāṇaṁ ahosi: ‘eseva maggo bodhāyā’ti … ‘kiṁ nu kho ahaṁ tassa sukhassa bhāyāmi, yaṁ taṁ sukhaṁ aññatreva kāmehi aññatra akusalehi dhammehī’ti?
맛지마 니까야 MN 36 대삿짜까경 (Mahāsaccakasutta) 배경
답은 뜻밖의 곳에서 왔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입니다. 아버지가 들에서 일하던 날, 나무 그늘에 앉아 있던 아이의 마음이 저절로 고요하고 맑았던 순간. 그는 그것을 떠올리고 "바로 이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이 중도의 핵심입니다. "어찌하여 나는 그 즐거움을 두려워하는가?" 고행자에게 즐거움은 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감각적 쾌락과 무관한 고요한 기쁨까지 적으로 삼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중도는 적당히 하자는 절충이 아니라, 몸을 망가뜨리지 않으면서 마음을 깨우는 제3의 길입니다. 이 깨달음 직후 그는 밥을 먹었고, 함께 고행하던 다섯 사람은 "저 사람은 타락했다"며 떠났습니다.
묵상
당신이 두려워서 밀어내는 편안함이 있나요? 쉬는 것, 잘 먹는 것, 고요해지는 것을 게으름으로 여기고 있다면, 그 편안함이 사실은 길일 가능성은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