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설법 - 사슴 동산에서 굴린 진리의 바퀴

침묵할 뻔했던 스승이 첫 다섯 사람 앞에 서기까지

‘내가 얻은 이 가르침은 깊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수승하며,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미묘하여 지혜로운 이라야 알 수 있느니라. 그러나 이 사람들은 집착을 즐기고 집착을 기뻐하고 집착에 만족하고 있다. … 내가 가르침을 펴더라도 남들이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피곤한 일이요 성가신 일이 되리라.’

‘Adhigato kho myāyaṁ dhammo gambhīro duddaso duranubodho santo paṇīto atakkāvacaro nipuṇo paṇḍitavedanīyo. Ālayarāmā kho panāyaṁ pajā ālayaratā ālayasammuditā … Ahañceva kho pana dhammaṁ deseyyaṁ, pare ca me na ājāneyyuṁ, so mamassa kilamatho, sā mamassa vihesā’ti.

맛지마 니까야 MN 26 성구경 (Pāsarāsisutta)

배경

깨달은 사람이 곧바로 가르치기 시작했으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경전의 기록은 다릅니다. 부처님은 망설이셨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알아낸 것이 너무 미묘해서 말로 옮기기 어렵고, 듣는 사람들은 "집착을 즐기고 집착을 기뻐하고 집착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 기울어진 마음은 가르치는 쪽이 아니라 침묵하는 쪽이었습니다. 이 장면이 삭제되지 않고 그대로 전해진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불교의 출발점에는 전능한 확신이 아니라, 전해질 수 있을까 하는 현실적인 회의가 있었습니다.

묵상

당신이 아는 무언가를 전하려다 포기한 적 있나요? "말해도 어차피 모를 텐데"라는 생각이 들 때, 그 판단은 상대에 대한 것일까요, 아니면 설명하기 싫은 마음에 대한 것일까요?

‘죽음 없음의 문은 열렸느니라. 귀 있는 자들은 믿음을 내라. 범천이여, 나는 성가시리라 여겨 사람들 사이에서 이 미묘하고 뛰어난 가르침을 펴지 않았느니라.’

‘Apārutā tesaṁ amatassa dvārā, Ye sotavanto pamuñcantu saddhaṁ; Vihiṁsasaññī paguṇaṁ na bhāsiṁ, Dhammaṁ paṇītaṁ manujesu brahme’ti.

맛지마 니까야 MN 26 성구경 (Pāsarāsisutta)

배경

침묵으로 기울던 마음을 돌린 것은 하나의 청이었습니다. 경전은 범천 사함빠띠가 나타나 "세존이시여, 가르침을 펴소서. 눈에 티끌이 적은 중생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가르침을 듣지 못해 쇠퇴합니다. 가르침을 이해할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청했다고 전합니다. 부처님은 세상을 둘러보셨습니다. 연못의 연꽃들이 어떤 것은 물속에 잠겨 있고, 어떤 것은 수면에 닿아 있고, 어떤 것은 물 위로 솟아 있듯 사람들도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답하셨습니다. "죽음 없음의 문은 열렸느니라." 가르침은 "모두를 깨우치겠다"는 각오가 아니라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 있다"는 판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묵상

모두가 알아듣지는 못해도 누군가는 알아듣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할까요? 당신이 지금 미루고 있는 말은 그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해볼 만한 말인가요?

‘수행자들이여, 여래를 이름으로 부르거나 벗이라 부르지 말라. 수행자들이여, 여래는 아라한이요 바르게 깨달은 이니라. 수행자들이여, 귀를 기울여라. 죽음 없음을 얻었으니 내가 가르치고 내가 가르침을 펴리라. 가르친 대로 행하면 그대들은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을 떠나 집 없는 삶으로 나아가는 그 목적인 위없는 청정한 삶의 완성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알고 실현하여 갖추어 머물게 되리라.’

‘Mā, bhikkhave, tathāgataṁ nāmena ca āvusovādena ca samudācaratha. Arahaṁ, bhikkhave, tathāgato sammāsambuddho. Odahatha, bhikkhave, sotaṁ, amatamadhigataṁ, ahamanusāsāmi, ahaṁ dhammaṁ desemi. Yathānusiṭṭhaṁ tathā paṭipajjamānā nacirasseva-yassatthāya kulaputtā sammadeva agārasmā anagāriyaṁ pabbajanti, tadanuttaraṁ-brahmacariyapariyosānaṁ diṭṭheva dhamme sayaṁ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hā’ti.

맛지마 니까야 MN 26 성구경 (Pāsarāsisutta)

배경

첫 청중을 고르는 과정도 경전에 남아 있습니다. 부처님은 먼저 옛 스승 두 분을 떠올렸으나 두 사람 모두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그래서 고행 시절을 함께한 다섯 사람을 찾아 먼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들은 밥을 먹기 시작한 그를 배신자로 여겨 "인사하지도 말고 일어서지도 말자"고 미리 약속했지만, 정작 다가오자 아무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자리를 펴고 발 씻을 물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이름을 부르며 "벗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씀은 그 호칭을 바로잡는 장면입니다. 다섯 사람은 세 번이나 "고행으로도 못 얻었으면서 어떻게 지금 얻었겠는가"라고 반문했고, 부처님은 세 번 같은 대답을 하신 뒤에야 비로소 설법을 시작하실 수 있었습니다.

묵상

당신을 가장 오래 지켜본 사람들이 오히려 당신의 변화를 가장 늦게 알아보는 일이 있지 않나요? 그럴 때 설득을 포기하는 대신 같은 말을 세 번 할 인내가 당신에게 있나요?

“수행자들이여, 집을 떠난 이가 가까이해서는 안 될 두 극단이 있다. 어떤 둘인가? 하나는 감각적 즐거움에 빠져 지내는 것이니, 낮고 천하고 범속하며 거룩하지 않고 이익이 없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를 괴롭히며 지내는 것이니, 괴롭고 거룩하지 않고 이익이 없다. 수행자들이여, 여래는 이 두 극단에 다가가지 않고 가운데 길을 온전히 깨달았느니라. 그 길은 눈을 만들고 앎을 만들며, 고요함과 뛰어난 앎과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느니라.”

“Dveme, bhikkhave, antā pabbajitena na sevitabbā. Katame dve? Yo cāyaṁ kāmesu kāmasukhallikānuyogo hīno gammo pothujjaniko anariyo anatthasaṁhito, yo cāyaṁ attakilamathānuyogo dukkho anariyo anatthasaṁhito. Ete kho, bhikkhave, ubho ante anupagamma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ṁvattat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전법륜경 (Dhammacakkappavattanasutta)

배경

첫 설법은 진리의 목록이 아니라 두 극단을 물리치는 말로 시작합니다. 듣는 이가 다섯 수행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처님과 함께 여섯 해를 스스로 괴롭히는 고행으로 보냈고, 부처님이 그 길을 놓았을 때 타락했다고 여겨 곁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 앞에서 부처님은 고행을 "괴롭고 거룩하지 않고 이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동시에 그들이 떠나온 감각적 즐거움의 삶도 "낮고 천하다"고 말합니다. 두 극단을 함께 물리친 뒤에야 가운데 길이 놓입니다. 가운데 길은 두 극단의 절충이나 적당함이 아닙니다. 경은 곧바로 그것을 여덟 가지로 이루어진 거룩한 길이라고 밝힙니다.

묵상

무엇인가를 그만두려 할 때, 반대쪽 끝으로 건너가는 방식을 택한 적이 있나요? 지나치게 누리던 것을 지나치게 끊는 식으로요. 두 극단을 모두 내려놓는 자리가 어떤 모습일지 잠시 그려 보면 어떨까요?

“수행자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에 대한 거룩한 진리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음도 괴로움이고, 병도 괴로움이고, 죽음도 괴로움이다. 싫은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며,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간추리면 매달리는 다섯 무더기가 괴로움이다. 수행자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이 생겨나는 원인에 대한 거룩한 진리다. 다시 태어남으로 이끌고, 즐김과 탐냄을 함께하며, 이곳저곳에서 기뻐하는 바로 그 갈망이니,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갈망, 존재에 대한 갈망,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망이다. 수행자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멎음에 대한 거룩한 진리다. 바로 그 갈망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멎는 것, 놓아 버림, 내려놓음, 풀려남, 매이지 않음이다. 수행자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멎음으로 이끄는 길에 대한 거룩한 진리다. 바로 이 여덟 가지로 이루어진 거룩한 길이니, 바른 봄 … 바른 집중이다.”

Idaṁ kho pana, bhikkhave, dukkhaṁ ariyasaccaṁ— jātipi dukkhā, jarāpi dukkhā, byādhipi dukkho, maraṇampi dukkhaṁ, appiyehi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 dukkho, yampicchaṁ na labhati tampi dukkhaṁ—saṅ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Idaṁ kho pana, bhikkhave, dukkhasamudayaṁ ariyasaccaṁ— yāyaṁ taṇhā ponob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tatrābhinandinī, seyyathidaṁ— kāmataṇhā, bhavataṇhā, vibhavataṇhā. Idaṁ kho pana, bhikkhave, dukkhanirodhaṁ ariyasaccaṁ— yo tassāyeva taṇhāya asesavirāganirodho cāgo paṭinissaggo mutti anālayo. Idaṁ kho pana, bhikkhave,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ṁ— ayameva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seyyathidaṁ— sammādiṭṭhi …pe… sammāsamādh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전법륜경 (Dhammacakkappavattanasutta)

배경

가운데 길을 밝힌 뒤 이어지는 본론입니다. 첫 설법에서 네 진리는 여기 한 번에 놓입니다 - 무엇이 괴로움인가, 어디서 생겨나는가, 멎을 수 있는가, 어떻게 멎는가. 넷째 진리가 가리키는 길은 앞에서 말한 가운데 길과 같은 것입니다. 극단을 피해 찾아낸 그 길이 여덟 가지로 이루어진 거룩한 길이고, 그것이 곧 괴로움을 멎게 하는 길입니다. 첫 설법의 처음과 끝이 이렇게 맞물립니다. 이 자리에서 다섯 수행자 가운데 꼰단냐에게 진리를 보는 눈이 열립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처음으로 남에게 건너간 순간입니다.

묵상

네 문장이 병을 진찰하는 순서와 닮았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나요? 무엇이 아픈지, 왜 아픈지, 나을 수 있는지, 어떻게 나을 수 있는지. 지금 마음에 걸리는 일 하나를 이 순서로 놓아 보면 어떤 자리에서 막히나요?

“이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존경받는 꼰단냐에게 먼지도 때도 없는, 진리를 보는 눈(담마짝쿠)이 생겨났다. ‘생겨나는 성질을 가진 것은 무엇이든, 모두 멎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 그때 그분께서 마음에서 우러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꼰단냐가 참으로 알아들었구나! 아, 꼰단냐가 참으로 알아들었구나!’”

Imasmiñca pana veyyākaraṇasmiṁ bhaññamāne āyasmato koṇḍaññassa virajaṁ vītamalaṁ dhammacakkhuṁ udapādi: “yaṁ kiñci samudayadhammaṁ sabbaṁ taṁ nirodhadhamman”ti … Atha kho bhagavā imaṁ udānaṁ udānesi: “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 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ti.

상윳따 니까야 SN 56.11 전법륜경 (Dhammacakkappavattanasutta)

배경

이 발췌는 경 후반의 두 장면을 생략 표시로 잇습니다. 앞에서는 꼰단냐에게 진리를 보는 눈이 생겼다고 서술하고, 뒤에서는 그가 알아들었다는 감탄이 두 번 나옵니다. 두 장면 사이의 신들의 외침과 세계의 흔들림, 빛에 대한 서술은 이 발췌에서는 줄였습니다. 한국어와 빠알리의 생략 범위는 같습니다. 다섯 수행자 모두가 같은 이해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구절은 아니며, 이 두 장면에서 이름을 밝힌 사람은 꼰단냐입니다. 생겨남과 멎음을 짝지은 이해가 마지막의 새 이름으로 이어지는 구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묵상

꼰단냐에게 진리를 보는 눈이 생긴 장면과 그분이 두 번 감탄한 장면을 생략 표시 너머로 함께 읽으면 어떻게 다가오나요? 자신의 이해가 지식인지 성취인지 판정할 필요는 없어요. “일어남”과 “멎음” 가운데 어느 말이 오래 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