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빠씨여, 서로 나뉘고 구별된 세 벌 가운데 나쁜 행위를 짓고 이어 가는 데 무엇이 가장 큰 허물입니까? 몸의 벌입니까, 말의 벌입니까, 마음의 벌입니까?” “고따마 벗이여, 나따뿟따는 몸의 벌이 가장 큰 허물이며 말의 벌과 마음의 벌은 그만하지 않다고 세웁니다.”
“Imesaṁ pana, tapassi, tiṇṇaṁ daṇḍānaṁ evaṁ paṭivibhattānaṁ evaṁ paṭivisiṭṭhānaṁ katamaṁ daṇḍaṁ nigaṇṭho nāṭaputto mahāsāvajjataraṁ paññapeti pāpassa kammassa kiriyāya pāpassa kammassa pavattiyā, yadi vā kāyadaṇḍaṁ, yadi vā vacīdaṇḍaṁ, yadi vā manodaṇḍan”ti? “Imesaṁ kho, āvuso gotama, tiṇṇaṁ daṇḍānaṁ evaṁ paṭivibhattānaṁ evaṁ paṭivisiṭṭhānaṁ kāyadaṇḍaṁ nigaṇṭho nāṭaputto mahāsāvajjataraṁ paññapeti pāpassa kammassa kiriyāya pāpassa kammassa pavattiyā, no tathā vacīdaṇḍaṁ, no tathā manodaṇḍan”ti.
맛지마 니까야 MN 56 우빨리경 (Upālisutta)배경
세 가지를 확정한 뒤 세존은 우열을 묻습니다. 질문에는 몸·말·마음의 세 항목이 다시 같은 순서로 모두 나오고, 답은 몸의 벌을 가장 큰 허물로 둡니다. no tathā는 말과 마음의 벌을 없다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벌만큼 크지는 않다고 비교하는 표현입니다. 이 차이를 보존해야 뒤에서 세존이 마음의 행위를 가장 무겁게 본다는 대조가 정확히 성립합니다.
묵상
눈에 보이는 행동이 생각이나 말보다 언제나 더 무겁다고 느끼나요? 결과의 크기와 그것을 낳은 의도를 따로 생각한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살펴야 할지 달라질 수 있을까요? 그 기준은 한결같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