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행위 때문에 어리석음을 알아보다

세 나쁜 행위가 없다면 알아볼 수 없지만 실제로 있기 때문에 현명한 이들이 그를 알아본다는 조건과 이유를 밝힙니다.

“수행자들이여, 어리석은 자가 잘못 생각하고 잘못 말하고 잘못 행동하지 않는다면, 현명한 이들이 어떻게 그를 ‘이 존자는 어리석고 참되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알겠느냐? 그러나 어리석은 자가 잘못 생각하고 잘못 말하고 잘못 행동하기 때문에, 현명한 이들은 그를 ‘이 존자는 어리석고 참되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아느니라.”

No cetaṁ, bhikkhave, bālo duccintitacintī ca abhavissa dubbhāsitabhāsī ca dukkaṭakammakārī ca kena naṁ paṇḍitā jāneyyuṁ: ‘bālo ayaṁ bhavaṁ asappuriso’ti? Yasmā ca kho, bhikkhave, bālo duccintitacintī ca hoti dubbhāsitabhāsī ca dukkaṭakammakārī ca tasmā naṁ paṇḍitā jānanti: ‘bālo ayaṁ bhavaṁ asappuriso’ti.

맛지마 니까야 MN 129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 (Bālapaṇḍitasutta)

배경

첫 문장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알겠는가”라는 부정 조건이고, 둘째 문장은 “그러하기 때문에 안다”라는 원인과 결과입니다. 생각·말·행동의 세 항목과 판단문은 두 갈래에서 모두 같은 순서로 반복됩니다. bhavaṁ은 판단 대상에게 쓰는 높임 호칭이므로 한국어에서도 “이 존자”를 남겨, 거친 욕설이 아니라 관찰된 행위에 근거한 진술임을 보존했습니다. 수행의 초점은 타인을 쉽게 규정하는 데 있지 않고, 내면의 생각도 말과 행동처럼 결과를 드러내는 행위 영역임을 아는 데 있습니다.

묵상

어떤 사람을 한 이름으로 고정하기 전에 실제 생각·말·행동을 구별해 보는 태도는 어떻게 느껴지나요? 타인을 분석하기보다, 오늘 자신의 한 반응에서 이 세 영역이 같은 방향이었는지만 조심스럽게 살펴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