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까지 삼백 자루 창의 고통을 묻다

저녁에 세 번째 백 자루 창을 더한 뒤 세존이 삼백 자루의 고통을 묻고, 비구들이 한 자루만으로도 괴롭다고 답합니다.

“늦은 오후에 왕이 묻느니라. ‘그 사람은 어떤가?’ ‘대왕이시여,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왕은 저녁에도 백 자루 창으로 찌르게 하느니라. 수행자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사람이 세 번의 백 자루, 곧 삼백 자루 창에 찔리면서 괴로움과 슬픔을 겪겠느냐?” “존자시여, 한 자루에 찔려도 괴로울 텐데 삼백 자루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Atha rājā sāyanhasamayaṁ evaṁ vadeyya: ‘ambho, kathaṁ so puriso’ti? ‘Tatheva, deva, jīvatī’ti. Tamenaṁ rājā evaṁ vadeyya: ‘gacchatha, bho, taṁ purisaṁ sāyanhasamayaṁ sattisatena hanathā’ti. Tamenaṁ sāyanhasamayaṁ sattisatena haneyyuṁ. Taṁ kiṁ maññatha, bhikkhave, api nu so puriso tīhi sattisatehi haññamāno tatonidānaṁ dukkhaṁ domanassaṁ paṭisaṁvediyethā”ti? “Ekissāpi, bhante, sattiyā haññamāno so puriso tatonidānaṁ dukkhaṁ domanassaṁ paṭisaṁvediyetha, ko pana vādo tīhi sattisatehī”ti?

맛지마 니까야 MN 129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 (Bālapaṇḍitasutta)

배경

세 번째 시간대는 늦은 오후의 확인과 저녁의 백 자루 창으로 닫힙니다. 세존은 아침·한낮·저녁의 백 자루를 합쳐 “세 번의 백 자루”라고 묻고, 수행자들은 수량을 줄여 한 자루만으로도 괴롭다고 답한 뒤 삼백 자루는 더 말할 것도 없다고 합니다. 질문과 답의 화자를 분리하고, 세 번·백·삼백·한이라는 수를 모두 보존했습니다. 이 비유는 고통을 정밀하게 측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극심한 사례를 다음 산과 돌의 비교로 다시 작게 만드는 단계입니다.

묵상

한 자루만으로도 충분히 괴롭다는 수행자들의 답은 고통을 숫자로 과장하지 않고 한 번의 상처도 가볍지 않게 봅니다. 자신의 고통을 남과 비교하지 않고 그 자체로 인정하는 태도는 어떻게 느껴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