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지식을 두 번째로 내려놓다

네 조건에서 하나를 더 뺄 수 있는지 묻자 소나단다가 베다 성전을 제외함

세존께서 물으셨습니다. “바라문이여, 이 네 요소 가운데 하나를 제쳐 두고 세 요소만 갖춘 이를 바라문이라고 규정해도, ‘나는 바라문이다’라고 바르게 말하여 거짓말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가?” 소나단다가 대답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고따마 존자여. 고따마 존자여, 이 네 요소 가운데 성전을 제쳐 두겠습니다. 성전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Imesaṁ pana, brāhmaṇa, catunnaṁ aṅgānaṁ sakkā ekaṁ aṅgaṁ ṭhapayitvā tīhaṅgehi samannāgataṁ brāhmaṇā brāhmaṇaṁ paññapetuṁ; ‘brāhmaṇosmī’ti ca vadamāno sammā vadeyya, na ca pana musāvādaṁ āpajjeyyā”ti? “Sakkā, bho gotama. Imesañhi, bho gotama, catunnaṁ aṅgānaṁ mante ṭhapayāma. Kiñhi mantā karissanti?

디가 니까야 DN 4 소나단다경 (Soṇadaṇḍasutta)

배경

세존의 둘째 질문은 앞 구조를 유지하면서 수량만 네에서 셋으로 줄입니다. 소나단다는 이번에는 mantā, 곧 암송하고 익힌 베다 성전을 제쳐 둡니다. “성전이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반문은 학문 자체를 무가치하다고 폐기하기보다, 바라문이라는 명칭의 필수 근거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답입니다. 이로써 외모와 학식이 빠지고 혈통·계행·지혜가 남습니다. 수행의 의미에서는 많이 알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실제 행위와 통찰을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음을 가려 냅니다. 다음에는 남은 세 조건을 다시 확인합니다.

묵상

많이 아는 것과 그 앎대로 사는 것이 어긋난 장면을 본 적이 있나요? 지식을 낮추지 않으면서도, 지금 내 행동을 실제로 바꾸는 앎이 무엇인지 살펴볼까요? 답이 떠오르지 않으면 잠시 그대로 두어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