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 굳어진 족쇄

족쇄에 사로잡혀 벗어남을 모르는 마음과, 일어난 족쇄에서 빠져나올 길을 아는 마음을 대비합니다.

“아난다여, 배우지 못한 보통 사람은 성스러운 이들을 보지 못하고 그들의 가르침에 익숙하지도 훈련되지도 않았으며, 참된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그들의 가르침에도 익숙하지도 훈련되지도 않았느니라. 그는 자아가 실재한다는 견해에 마음이 사로잡혀 짓눌린 채 머물고, 그 견해가 일어났을 때 벗어날 길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느니라. 그 견해는 굳어지고 제거되지 않아 낮은 족쇄가 되느니라.”

“Idhānanda, assutavā puthujjano ariyānaṁ adassāvī ariyadhammassa akovido ariyadhamme avinīto, sappurisānaṁ adassāvī sappurisadhammassa akovido sappurisadhamme avinīto sakkāyadiṭṭhipariyuṭṭhitena cetasā viharati sakkāyadiṭṭhiparetena; uppannāya ca sakkāyadiṭṭhiyā nissaraṇaṁ yathābhūtaṁ nappajānāti. Tassa sā sakkāyadiṭṭhi thāmagatā appaṭivinītā orambhāgiyaṁ saṁyojanaṁ.

맛지마 니까야 MN 64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긴 경 (Mahāmālukyasutta)

배경

부처님은 먼저 배우지 못한 보통 사람의 마음을 설명하십니다. 여기서 배움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성스러운 이들의 가르침을 만나 마음의 반응과 벗어나는 길을 훈련했는지를 뜻합니다. 자아가 실재한다는 견해가 일어날 때 그 마음은 견해에 점령되고, 빠져나오는 방법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일시적인 생각이 반복과 집착을 통해 굳어져 사람을 아래쪽 삶에 묶는 족쇄로 작동하게 됩니다.

묵상

어떤 생각이 떠오른 사실과 그 생각에 마음 전체가 점령된 상태를 구별할 수 있나요? 나에 대한 굳은 판단이 일어날 때 그것을 곧 사실로 따르지 않고, 그 견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금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경험은 무엇인가요?

“그는 의심에 마음이 사로잡혀 짓눌리고, 일어난 의심에서 벗어날 길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느니라. 그 의심은 굳어지고 제거되지 않아 낮은 족쇄가 되느니라. 그는 계율과 의례에 대한 집착에 마음이 사로잡혀 짓눌리고, 그 집착에서 벗어날 길을 알지 못하느니라. 그 집착은 굳어지고 제거되지 않아 낮은 족쇄가 되느니라.”

Vicikicchāpariyuṭṭhitena cetasā viharati vicikicchāparetena; uppannāya ca vicikicchāya nissaraṇaṁ yathābhūtaṁ nappajānāti. Tassa sā vicikicchā thāmagatā appaṭivinītā orambhāgiyaṁ saṁyojanaṁ. Sīlabbataparāmāsapariyuṭṭhitena cetasā viharati sīlabbataparāmāsaparetena; uppannassa ca sīlabbataparāmāsassa nissaraṇaṁ yathābhūtaṁ nappajānāti. Tassa so sīlabbataparāmāso thāmagato appaṭivinīto orambhāgiyaṁ saṁyojanaṁ.

맛지마 니까야 MN 64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긴 경 (Mahāmālukyasutta)

배경

의심과 계율 및 의식에 대한 집착도 같은 구조로 족쇄가 됩니다. 질문하는 능력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의심에 압도되어 아무 길도 걷지 못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법을 모르는 상태가 문제입니다. 계율과 의식도 삶을 바르게 세우는 도구이지만, 형식 자체가 나를 구원한다고 붙들면 또 하나의 속박이 됩니다. 부처님은 무엇이 일어났는지뿐 아니라, 마음이 그것에 점령되었고 출구를 아는지를 기준으로 살피십니다.

묵상

확인하기 위한 건강한 질문과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의심은 내 안에서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나요? 도움이 되는 규칙을 지키는 일과 규칙 자체에 기대는 일의 경계는 어디인가요?

“그는 감각적 욕망에 마음이 사로잡혀 짓눌리고, 일어난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날 길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느니라. 그 욕망은 굳어지고 제거되지 않아 낮은 족쇄가 되느니라. 그는 악의에 마음이 사로잡혀 짓눌리고, 일어난 악의에서 벗어날 길을 알지 못하느니라. 그 악의는 굳어지고 제거되지 않아 낮은 족쇄가 되느니라.”

Kāmarāgapariyuṭṭhitena cetasā viharati kāmarāgaparetena; uppannassa ca kāmarāgassa nissaraṇaṁ yathābhūtaṁ nappajānāti. Tassa so kāmarāgo thāmagato appaṭivinīto orambhāgiyaṁ saṁyojanaṁ. Byāpādapariyuṭṭhitena cetasā viharati byāpādaparetena; uppannassa ca byāpādassa nissaraṇaṁ yathābhūtaṁ nappajānāti. Tassa so byāpādo thāmagato appaṭivinīto orambhāgiyaṁ saṁyojanaṁ.

맛지마 니까야 MN 64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긴 경 (Mahāmālukyasutta)

배경

감각적 욕망과 악의 역시 잠깐 스쳐 간 느낌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마음이 그 힘에 사로잡히고, 벗어나는 길을 알지 못하며, 반복 속에서 굳어질 때 족쇄가 됩니다. 원하는 대상을 얻어야만 편안하다고 믿는 마음과 싫은 대상을 없애야만 편안하다고 믿는 마음은 방향은 반대지만 똑같이 외부 조건에 자유를 맡깁니다. 부처님은 두 반응 모두에서 출구를 보지 못하는 상태를 마음의 속박으로 짚으십니다.

묵상

무언가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마음과 반드시 밀어내야 한다는 마음 가운데 어느 쪽에 더 자주 붙잡히나요? 그 반응이 일어나는 순간에도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는 작은 틈을 느껴 본 적이 있나요?

“그러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성스러운 이들을 보았고 그 가르침에 익숙하고 잘 훈련되었으며, 참된 사람들을 보았고 그 가르침에도 익숙하고 잘 훈련되었느니라. 그는 자아가 실재한다는 견해에 마음이 사로잡혀 짓눌린 채 머물지 않고, 그 견해가 일어났을 때 벗어날 길을 있는 그대로 아느니라. 그 견해는 잠재 성향과 함께 버려지느니라.”

Sutavā ca kho, ānanda, ariyasāvako ariyānaṁ dassāvī ariyadhammassa kovido ariyadhamme suvinīto, sappurisānaṁ dassāvī sappurisadhammassa kovido sappurisadhamme suvinīto na sakkāyadiṭṭhipariyuṭṭhitena cetasā viharati na sakkāyadiṭṭhiparetena; uppannāya ca sakkāyadiṭṭhiyā nissaraṇaṁ yathābhūtaṁ pajānāti. Tassa sā sakkāyadiṭṭhi sānusayā pahīyati.

맛지마 니까야 MN 64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긴 경 (Mahāmālukyasutta)

배경

이제 앞선 설명의 반대편에 성스러운 제자가 놓입니다. 차이는 어떤 견해도 다시 일어나지 않는 무감각함에 있지 않습니다. 견해가 일어날 때 그것에 마음 전체를 빼앗기지 않고, 빠져나오는 길을 있는 그대로 안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앎은 단순한 억제가 아니라 반복되는 뿌리까지 약하게 하여 마침내 잠재 성향과 함께 버리게 합니다. 배움과 훈련은 마음속 사건을 없애는 기술보다 자유로 돌아오는 길을 익히는 과정입니다.

묵상

불편한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기를 바라나요, 아니면 떠오른 생각에서 자유롭게 물러날 수 있기를 바라나요? 이미 알고 있는 나만의 건강한 출구가 있다면 어떤 경험을 통해 배웠나요?

“그는 의심에 마음이 사로잡혀 짓눌리지 않고, 일어난 의심에서 벗어날 길을 있는 그대로 아느니라. 그 의심은 잠재 성향과 함께 버려지느니라. 그는 계율과 의례에 대한 집착에 마음이 사로잡혀 짓눌리지 않고, 그 집착에서 벗어날 길을 아느니라. 그 집착은 잠재 성향과 함께 버려지느니라.”

Na vicikicchāpariyuṭṭhitena cetasā viharati na vicikicchāparetena; uppannāya ca vicikicchāya nissaraṇaṁ yathābhūtaṁ pajānāti. Tassa sā vicikicchā sānusayā pahīyati. Na sīlabbataparāmāsapariyuṭṭhitena cetasā viharati na sīlabbataparāmāsaparetena; uppannassa ca sīlabbataparāmāsassa nissaraṇaṁ yathābhūtaṁ pajānāti. Tassa so sīlabbataparāmāso sānusayo pahīyati.

맛지마 니까야 MN 64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긴 경 (Mahāmālukyasutta)

배경

성스러운 제자에게도 점검할 질문과 생활의 규칙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의심이나 형식이 마음을 지배하지 않으며, 그것을 목적처럼 붙들지 않습니다. 일어난 상태를 알아차리고 출구를 알기 때문에 현재의 반응뿐 아니라 그 반응을 되풀이하는 잠재 성향까지 놓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하는 자유는 아무 기준도 갖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질문과 규칙을 바르게 사용하면서도 그것들의 포로가 되지 않는 유연함에 가깝습니다.

묵상

내가 따르는 원칙은 삶을 더 정직하고 자유롭게 하나요, 아니면 다른 사람과 나를 재단하는 벽이 되나요? 의심이 생겼을 때 확인하고 배우는 쪽으로 움직일 여지는 얼마나 남아 있나요?

“그는 감각적 욕망에 마음이 사로잡혀 짓눌리지 않고, 일어난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날 길을 있는 그대로 아느니라. 그 욕망은 잠재 성향과 함께 버려지느니라. 그는 악의에 마음이 사로잡혀 짓눌리지 않고, 일어난 악의에서 벗어날 길을 아느니라. 그 악의는 잠재 성향과 함께 버려지느니라.”

Na kāmarāgapariyuṭṭhitena cetasā viharati na kāmarāgaparetena; uppannassa ca kāmarāgassa nissaraṇaṁ yathābhūtaṁ pajānāti. Tassa so kāmarāgo sānusayo pahīyati. Na byāpādapariyuṭṭhitena cetasā viharati na byāpādaparetena; uppannassa ca byāpādassa nissaraṇaṁ yathābhūtaṁ pajānāti. Tassa so byāpādo sānusayo pahīyati.

맛지마 니까야 MN 64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긴 경 (Mahāmālukyasu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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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악의가 나타나더라도 성스러운 제자는 그 상태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무엇에 끌리고 무엇을 밀어내는지 알아차리며, 그 반응을 계속 먹여 키우지 않는 길을 압니다. 그래서 표면의 충동만 잠시 누르는 데 그치지 않고 잠재 성향까지 놓게 됩니다. 앞선 보통 사람과의 차이는 특별한 감정을 갖는 데 있지 않고, 일어난 감정에 점령되지 않으며 벗어남을 실제로 익혔다는 데 있습니다.

묵상

강한 욕망이나 미움이 일어날 때 그것을 곧 나 자신이라고 느끼나요? 그 상태가 일어난 사실과 그것을 바라보는 알아차림 사이에 거리를 두고, 족쇄가 마음을 점령하기 전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최근 순간을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