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난다여 낮은 다섯 족쇄를 버리는
길과 수행은 무엇인가?
여기 수행자는 집착에서 멀리 떠나고
해로운 것들을 버리며
몸의 모든 불편이 가라앉아,
감각적 욕망과 해로운 것들에서 벗어나
생각을 일으키고 이어 가며
떠남에서 난 희열과 행복이 있는
첫 번째 선정에 들어 머무느니라.
그는 그곳의 물질, 느낌, 인식, 의지적 형성, 의식을
무상하고 괴로우며 병, 종기, 화살, 재앙, 괴로움과 같고,
낯설고 부서지며 비어 있고 자아가 아니라고 관찰하느니라.”
Katamo cānanda, maggo, katamā paṭipadā pañcannaṁ orambhāgiyānaṁ saṁyojanānaṁ pahānāya? Idhānanda, bhikkhu upadhivivekā akusalānaṁ dhammānaṁ pahānā sabbaso kāyaduṭṭhullānaṁ paṭippassaddhiyā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ṁ savicāraṁ vivekajaṁ pītisukhaṁ paṭham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So yadeva tattha hoti rūpagataṁ vedanāgataṁ saññāgataṁ saṅkhāragataṁ viññāṇagataṁ te dhamme aniccato dukkhato rogato gaṇḍato sallato aghato ābādhato parato palokato suññato anattato samanupassati.
맛지마 니까야 MN 64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긴 경 (Mahāmālukyasutta) 배경
족쇄를 버리는 길은 첫 번째 선정에서 시작되지만 고요함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집착과 해로운 마음에서 물러나 깊은 안정에 든 뒤, 그 안의 물질과 느낌, 인식, 의지 작용, 의식도 무상하고 불완전하며 자아가 아닌 것으로 살핍니다. 선정은 변하지 않는 피난처가 아니라 조건 지어진 경험을 또렷이 볼 수 있게 하는 바탕입니다. 부처님은 안정과 통찰을 한 흐름으로 묶어 다섯 족쇄의 뿌리까지 향하게 하십니다.
묵상
마음이 고요해졌을 때 그 편안함을 붙잡는 편인가요, 아니면 더 분명히 바라볼 바탕으로 삼나요? 첫 선정 안의 물질과 느낌과 인식과 형성 작용과 의식도 무상하고 비어 있음을 본다면, 그 고요를 나라고 붙드는 마음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그는 마음을 그 모든 현상에서 돌리고,
마음을 그것들에서 돌린 뒤
죽음 없는 요소로 향하게 하느니라.
‘이것은 평화롭고 뛰어나다.
모든 의지적 형성의 고요, 모든 집착의 놓아 버림,
갈애의 소멸, 빛바램, 소멸, 열반이니라.’”
So tehi dhammehi cittaṁ paṭivāpeti. So tehi dhammehi cittaṁ paṭivāpetvā amatāya dhātuyā cittaṁ upasaṁharati: ‘etaṁ santaṁ etaṁ paṇītaṁ yadidaṁ sabbasaṅkhārasamatho sabbūpadhipaṭinissaggo taṇhākkhayo virāgo nirodho nibbānan’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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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과 무아를 본 마음은 선정 안의 모든 조건 지어진 현상에서 돌아서서 죽음 없는 요소로 향합니다. 부처님은 그 방향을 모든 형성 작용의 고요, 모든 집착의 놓아 버림, 갈애의 소멸, 빛바램, 소멸, 열반이라고 차례로 밝히십니다. 훌륭한 경험을 더 오래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 지어진 작용과 그것을 붙드는 갈애가 함께 고요해지는 자리입니다. 선정의 평온은 이 더 깊은 놓아 버림을 향할 때 해탈의 길이 됩니다.
묵상
아주 평온한 마음 상태도 여러 조건이 빚은 형성 작용임을 볼 수 있나요? 그 평온을 소유하려 하기보다 모든 형성 작용이 고요해지는 방향으로 마음을 돌릴 때, 지금 놓아야 할 집착과 갈애는 무엇인가요?
“그곳에 굳게 서서 그는 번뇌의 소멸에 이르느니라.
번뇌의 소멸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그 수행을 사랑하고 기뻐한 힘으로
낮은 다섯 족쇄가 완전히 사라져 저절로 태어나며,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어
그 세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느니라.
이것도 낮은 다섯 족쇄를 버리는
길이며 수행이니라.”
So tattha ṭhito āsavānaṁ khayaṁ pāpuṇāti; no ce āsavānaṁ khayaṁ pāpuṇāti teneva dhammarāgena tāya dhammanandiyā pañcannaṁ orambhāgiyānaṁ saṁyojanānaṁ parikkhayā opapātiko hoti, tattha parinibbāyī, anāvattidhammo tasmā lokā. Ayampi kho, ānanda, maggo ayaṁ paṭipadā pañcannaṁ orambhāgiyānaṁ saṁyojanānaṁ pahānā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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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선정에서 통찰하고 마음을 죽음 없는 요소로 향한 수행은 두 가능한 열매로 이어집니다. 통찰이 완성되면 번뇌가 다합니다. 그 자리에서 완전한 소멸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낮은 다섯 족쇄가 끊겨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경지에 이릅니다. 이 대목은 선정의 깊이만으로 성취를 말하지 않습니다. 고요한 경험을 무상과 무아로 살피고, 그 경험에서도 돌아서서 놓아 버림으로 향하는 지혜가 핵심입니다.
묵상
완전한 결과가 당장 오지 않으면 지금의 연습을 무의미하다고 여기나요? 이미 약해진 집착과 넓어진 선택의 여지를 하나의 실제 열매로 인정한다면 수행을 보는 마음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또한 아난다여, 생각을 일으키고 이어 가는 작용이 고요해져
수행자는 두 번째 선정에 들어 머무느니라. …
세 번째 선정에 …
네 번째 선정에 들어 머무느니라.
그곳의 물질, 느낌, 인식, 의지적 형성, 의식을 …
관찰하고 …
그 세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느니라.
이것도 낮은 다섯 족쇄를 버리는
길이며 수행이니라.”
Puna caparaṁ, ānanda, bhikkhu vitakkavicārānaṁ vūpasamā …pe… dutiy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pe… tatiyaṁ jhānaṁ …pe… catutthaṁ jhānaṁ upasampajja viharati. So yadeva tattha hoti rūpagataṁ vedanāgataṁ saññāgataṁ saṅkhāragataṁ viññāṇagataṁ … pe… anāvattidhammo tasmā lokā. Ayampi kho, ānanda, maggo ayaṁ paṭipadā pañcannaṁ orambhāgiyānaṁ saṁyojanānaṁ pahānā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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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은 두 번째부터 네 번째 선정까지를 반복 생략 부호로 묶습니다. 각 선정의 세부 공식은 줄였지만 수행의 구조는 첫 번째 선정과 같습니다. 그 고요 속의 물질, 느낌, 인식, 의지 작용, 의식을 조건 지어진 것으로 살피고 마음을 놓아 버림으로 돌립니다. 경전 자체가 사용한 생략을 그대로 보존한 대목이며, 어느 선정도 소유할 최종 목적이 아니라 다섯 족쇄를 끊는 통찰의 바탕이라는 점을 반복합니다.
묵상
경험이 더 깊고 섬세해질수록 그것을 특별한 나의 성취로 붙잡고 싶어지나요? 좋은 상태를 등급으로 비교하지 않고 모두 생겨나고 사라지는 현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요? 무엇을 붙들고 있나요?
“또한 아난다여, 수행자는 물질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넘고
부딪힘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며
다양함에 대한 인식에 마음을 두지 않고,
‘공간은 끝없다’고 알아
무한한 공간의 영역에 들어 머무느니라.
그곳의 느낌, 인식, 의지적 형성, 의식을 …
관찰하고 …
그 세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느니라.
이것도 낮은 다섯 족쇄를 버리는 길이며 수행이니라.”
Puna caparaṁ, ānanda, bhikkhu sabbaso rūpasaññānaṁ samatikkamā paṭighasaññānaṁ atthaṅgamā nānattasaññānaṁ amanasikārā ‘ananto ākāso’ti ākāsānañcāyatanaṁ upasampajja viharati. So yadeva tattha hoti vedanāgataṁ saññāgataṁ saṅkhāragataṁ viññāṇagataṁ … pe… anāvattidhammo tasmā lokā. Ayampi kho, ānanda, maggo ayaṁ paṭipadā pañcannaṁ orambhāgiyānaṁ saṁyojanānaṁ pahānā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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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물질적 선정을 넘어 이제 무한한 공간의 영역이 제시됩니다. 물질의 형태와 부딪힘, 다양함에 대한 인식을 놓고 공간의 끝없음에 머뭅니다. 그러나 이 매우 넓고 고요한 경험도 느낌과 인식, 의지 작용, 의식으로 이루어진 조건 지어진 상태입니다. 원문의 생략 부호는 앞에서 밝힌 통찰과 열매가 그대로 적용됨을 뜻합니다. 넓어진 의식도 무상과 무아로 살피며 집착하지 않을 때 족쇄를 버리는 길이 됩니다.
묵상
마음이 넓고 경계 없이 느껴지는 순간을 영원한 본질처럼 붙잡은 적이 있나요? 아무리 넓은 경험도 변하는 과정이라면, 그 안에서 자유는 소유보다 놓아 버림에 있지 않을까요? 무엇이 더 가벼울까요?
“또한 아난다여, 수행자는 무한한 공간의 영역을 완전히 넘어
‘의식은 끝없다’고 알아
무한한 의식의 영역에 들어 머무느니라.
그곳의 느낌, 인식, 의지적 형성, 의식을 …
관찰하고 …
그 세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느니라.
이것도 낮은 다섯 족쇄를 버리는 길이며 수행이니라.”
Puna caparaṁ, ānanda, bhikkhu sabbaso ākāsānañcāyatanaṁ samatikkamma ‘anantaṁ viññāṇan’ti viññāṇañcāyatanaṁ upasampajja viharati. So yadeva tattha hoti vedanāgataṁ saññāgataṁ saṅkhāragataṁ viññāṇagataṁ … pe… anāvattidhammo tasmā lokā. Ayampi kho, ānanda, maggo ayaṁ paṭipadā pañcannaṁ orambhāgiyānaṁ saṁyojanānaṁ pahānāya.
맛지마 니까야 MN 64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긴 경 (Mahāmālukyasutta) 배경
무한한 공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그 공간을 아는 의식의 끝없음에 머뭅니다. 경험의 초점이 대상인 공간에서 그것을 아는 의식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무한하게 느껴지는 의식조차 영원한 자아로 선언하지 않으십니다. 그 안의 느낌, 인식, 의지 작용, 의식 자체를 다시 조건 지어진 현상으로 관찰하게 합니다. 매우 미세한 마음 상태에서도 붙잡지 않는 통찰이 다섯 족쇄를 끊는 같은 길로 이어집니다.
묵상
모든 경험을 아는 의식만큼은 변하지 않는 나라고 느끼나요? 무한한 의식의 경지도 집중이라는 조건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형성임을 본다면, 의식을 영원한 자아로 붙들던 마음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또한 아난다여, 수행자는 무한한 의식의 영역을 완전히 넘어
‘아무것도 없다’고 알아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 들어 머무느니라.
그곳의 느낌, 인식, 의지적 형성, 의식을 …
관찰하고 …
그 세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느니라.
이것도 낮은 다섯 족쇄를 버리는 길이며 수행이니라.”
Puna caparaṁ, ānanda, bhikkhu sabbaso viññāṇañcāyatanaṁ samatikkamma ‘natthi kiñcī’ti ākiñcaññāyatanaṁ upasampajja viharati. So yadeva tattha hoti vedanāgataṁ saññāgataṁ saṅkhāragataṁ viññāṇagataṁ … pe… anāvattidhammo tasmā lokā. Ayampi kho, ānanda, maggo ayaṁ paṭipadā pañcannaṁ orambhāgiyānaṁ saṁyojanānaṁ pahānāyā”ti.
맛지마 니까야 MN 64 말룽끼야뿟따에 대한 긴 경 (Mahāmālukyasutta) 배경
의식의 끝없음마저 넘어 아무것도 없음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대상이 거의 사라진 극도로 미세한 고요이지만, 이 상태도 여전히 느낌과 인식, 의지 작용, 의식이 조건에 따라 이어지는 경험입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없다는 평온을 최종 해방으로 붙잡지 않고 앞서와 같은 통찰을 적용합니다. 이 경이 제시하는 선정의 사다리는 더 특별한 상태를 소유하는 경쟁이 아니라, 가장 섬세한 경험에서도 자아와 집착을 놓는 훈련입니다.
묵상
아무것도 없음의 고요를 더는 잃지 않을 마지막 안전지대로 여기고 싶을 때가 있나요? 그 경지도 조건에 따라 생겨난 인식임을 보고 죽음 없는 요소로 마음을 돌린다면, 아무것도 없음에 기대던 집착을 놓을 수 있을까요?
아난다 존자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낮은 다섯 족쇄를 버리는
길이며 수행이라면,
어째서 어떤 수행자는 마음으로 해탈하고
어떤 수행자는 지혜로 해탈합니까?”
“아난다여, 그 경우에는
각자의 능력에 차이가 있다고 나는 말하느니라.”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 존자는 기뻐하며
세존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Eso ce, bhante, maggo esā paṭipadā pañcannaṁ orambhāgiyānaṁ saṁyojanānaṁ pahānāya, atha kiñcarahi idhekacce bhikkhū cetovimuttino ekacce bhikkhū paññāvimuttino”ti? “Ettha kho panesāhaṁ, ānanda, indriyavemattataṁ vadāmī”ti. Idamavoca bhagavā. Attamano āyasmā ānando bhagavato bhāsitaṁ abhinandī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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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다는 같은 길을 걷는 수행자들에게 마음 해탈과 지혜 해탈이라는 차이가 생기는 이유를 묻습니다. 부처님의 대답은 짧습니다. 각자가 지닌 능력의 차이 때문입니다. 앞에서 여러 선정과 통찰의 길을 함께 제시한 이유도 모든 사람이 똑같은 경험의 모양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고요가 두드러진 사람과 지혜의 통찰이 두드러진 사람은 다를 수 있지만, 족쇄를 버리고 집착에서 풀려난다는 방향은 같습니다.
묵상
다른 사람의 수행 경험을 기준으로 내 길을 부족하다고 재단하고 있나요? 마음의 안정과 분명한 이해 가운데 지금 내게 더 익숙한 능력은 무엇이며, 덜 익숙한 쪽도 존중하며 기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