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보는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느낌·인식·의지적 형성·의식에 싫증이 나느니라. 싫증이 나면 탐욕이 사라지고, 탐욕이 사라지면 해탈하느니라.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앎이 생기느니라. ‘태어남은 끝났고, 청정한 삶은 완성되었으며, 할 일은 다 했고, 다시 이런 존재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아느니라.”
Evaṁ passaṁ,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rūpasmimpi nibbindati, vedanāyapi nibbindati, saññāyapi nibbindati, saṅkhāresupi nibbindati, viññāṇasmimpi nibbindati. Nibbindaṁ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ṁ vimuttamiti ñāṇaṁ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ṁ brahmacariyaṁ, kataṁ karaṇīyaṁ, nāparaṁ itthattāyā’ti pajānātī”ti.
상윳따 니까야 SN 22.59 나라고 할 수 없음을 밝힌 경 (Anattalakkhaṇasutta)배경
모든 무더기를 세 부정으로 본 결과가 원인과 결과의 연쇄로 제시됩니다.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다섯 무더기에 싫증이 나고, 그 싫증은 탐욕의 소멸로, 탐욕의 소멸은 해탈로, 해탈은 해탈했다는 앎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싫증은 경험을 미워하라는 감정이 아니라 그 안에서 영원한 만족과 자아를 찾던 매혹이 풀리는 방향입니다. 마지막 네 선언은 태어남, 청정한 삶, 해야 할 일, 다시 돌아옴에 관해 길이 완성되었음을 확인합니다.
묵상
싫증·탐욕의 소멸·해탈·앎이 차례로 이어지는 문장 가운데 어느 연결이 가장 천천히 읽히나요? 자신의 성취를 판단하거나 특별한 상태를 찾아야 할 필요는 없어요. 지금은 이 순서가 서로 어떻게 기대어 있는지만 살펴보면 어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