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노력은 절제·버림·닦음·보존의 노력입니다. 벗들이여, 절제의 노력이란 무엇입니까? 벗들이여, 수행자는 눈으로 형상을 보고 특징과 세부를 붙잡지 않습니다. 눈의 기능을 절제하지 않은 채 머물면 탐욕과 낙담이라는 나쁘고 해로운 현상들이 밀려들기에, 이를 절제하려 수행하고 눈의 기능을 지키며 눈의 기능에 대한 절제를 성취합니다.”
Cattāri padhānāni. Saṁvarapadhānaṁ pahānapadhānaṁ bhāvanāpadhānaṁ anurakkhaṇāpadhānaṁ. Katamañcāvuso, saṁvarapadhānaṁ? Idhāvuso, bhikkhu cakkhunā rūpaṁ disvā na nimittaggāhī hoti nānubyañjanaggāhī. Yatvādhikaraṇamenaṁ cakkhundriyaṁ asaṁvutaṁ viharantaṁ abhijjhādomanassā pāpakā akusalā dhammā anvāssaveyyuṁ, tassa saṁvarāya paṭipajjati, rakkhati cakkhundriyaṁ, cakkhundriye saṁvaraṁ āpajjati.
디가 니까야 DN 33 상기띠경 (Saṅgītisutta)배경
절제·버림·닦음·보존이라는 네 노력 가운데 첫째인 절제의 노력을 묻습니다. 답은 눈으로 형상을 보는 경우부터 시작합니다. 수행자는 형상의 특징과 세부를 붙잡지 않습니다. 눈의 기능을 절제하지 않은 채 머물면 탐욕과 낙담이라는 나쁘고 해로운 현상들이 밀려든다는 조건과 결과가 이어집니다. 그 때문에 눈을 절제하려 수행하고, 눈의 기능을 지키며, 눈의 기능에 대한 절제를 성취한다는 세 동작이 차례로 나옵니다. 단순히 “눈을 지킨다”는 한 동작으로 줄이지 않고 수행·지킴·성취를 모두 밝힙니다.
묵상
형상을 봄·특징을 붙잡음·눈의 기능을 지킴이라는 말을 차례로 들을 때 어느 표현에서 시선이나 숨이 달라지나요? 실제로 탐욕이나 낙담이 있는지 판단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한 말이 몸에 남긴 반응만 볼까요, 아니면 이 물음을 건너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