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이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여. 그런 말은 마십시오. 세존을 잘못 전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전함은 좋지 않습니다. 세존은 그러실 리 없습니다. 벗들이여, 함께 기뻐하는 마음의 해탈을 닦고 거듭 닦아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아 확립하고 익혀 잘 성취했는데도 불만이 마음을 사로잡아 머무는 것은 불가능하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벗들이여, 불만에서 벗어남은 함께 기뻐하는 마음의 해탈입니다.”
so ‘mā hevan’tissa vacanīyo ‘māyasmā evaṁ avaca, mā bhagavantaṁ abbhācikkhi, na hi sādhu bhagavato abbhakkhānaṁ, na hi bhagavā evaṁ vadeyya. Aṭṭhānametaṁ, āvuso, anavakāso, yaṁ muditāya cetovimuttiyā bhāvitāya bahulīkatāya yānīkatāya vatthukatāya anuṭṭhitāya paricitāya susamāraddhāya, atha ca panassa arati cittaṁ pariyādāya ṭhassati, netaṁ ṭhānaṁ vijjati. Nissaraṇaṁ hetaṁ, āvuso, aratiyā, yadidaṁ muditā cetovimuttī’ti.
디가 니까야 DN 33 상기띠경 (Saṅgītisutta)배경
앞의 주장에 대한 답이 여기서 완결됩니다. 먼저 “그렇지 않다”고 하고, 그런 말을 하지 말며 세존을 잘못 전하지 말라는 두 금지를 둡니다. 잘못 전함은 좋지 않고 세존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신다는 두 부정도 이어집니다. 이어 두 번의 “벗들이여” 사이에서 함께 기뻐함을 닦는 일곱 표현을 모두 되풀이하고, 그때 불만이 마음을 지배하는 일은 불가능하고 여지가 없으며 그럴 수 없다고 세 겹으로 판정합니다. 결론은 불만에서 벗어남과 함께 기뻐하는 마음의 해탈을 정확히 대응시킵니다.
묵상
누군가의 행복을 기뻐한 뒤 불만이 잠시 가벼워진 경험이 있나요? 억지로 기뻐하거나 비교하는 마음을 숨길 필요는 없어요. 지금 떠오르는 편안한 사례 하나에서 마음이 넓어지는 반응과 좁아지는 반응 중 무엇이 먼저 느껴지는지 살펴볼까요, 아니면 지금은 지나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