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특징에서 벗어나는 마음의 풀려남

의식이 표상을 따를 가능성을 온전히 부정하고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모든 표상에서 벗어남으로 확정함

그에게 이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여. 그런 말은 마십시오. 세존을 잘못 전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전함은 좋지 않습니다. 세존은 그러실 리 없습니다. 벗들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닦고 거듭 닦아 수레로 삼고 토대로 삼아 확립하고 익혀 잘 성취했는데도 의식이 표상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벗들이여, 모든 표상에서 벗어남은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입니다.”

So ‘mā hevan’tissa vacanīyo ‘māyasmā evaṁ avaca, mā bhagavantaṁ abbhācikkhi, na hi sādhu bhagavato abbhakkhānaṁ, na hi bhagavā evaṁ vadeyya. Aṭṭhānametaṁ, āvuso, anavakāso, yaṁ animittāya cetovimuttiyā bhāvitāya bahulīkatāya yānīkatāya vatthukatāya anuṭṭhitāya paricitāya susamāraddhāya, atha ca panassa nimittānusāri viññāṇaṁ bhavissati, netaṁ ṭhānaṁ vijjati. Nissaraṇaṁ hetaṁ, āvuso, sabbanimittānaṁ, yadidaṁ animittā cetovimuttī’ti.

디가 니까야 DN 33 상기띠경 (Saṅgītisutta)

배경

다섯째 주장에 대한 교정은 그렇지 않다는 답, 말하지 말라는 금지, 세존을 잘못 전하지 말라는 금지, 잘못 전함은 좋지 않다는 부정, 세존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신다는 부정을 모두 갖춥니다. 이어 두 호격 사이에서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을 닦는 일곱 표현을 반복하고, 의식이 표상을 따르는 일은 불가능하고 여지가 없으며 그럴 수 없다고 세 겹으로 판정합니다. 결론의 범위는 한 표상이 아니라 모든 표상이며, 모든 표상에서 벗어남을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과 대응시켜 다섯째 사례를 닫습니다.

묵상

“모든 표상에서 벗어남은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이라는 결론을 들을 때 편안함·낯섦·의문 가운데 어떤 반응이 먼저 나타나나요? 이를 자신의 성취 단계로 판정하거나 당장 표상에서 벗어나려 할 필요는 없어요. 한 반응만 잠시 살펴볼까요, 아니면 그대로 지나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