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 생각을 정하고 굳히며 기릅니다. 더 높이 기르지 않고 낮은 것에 머문 그 생각은 그곳에 태어나게 합니다. 이는 윤리적인 이에게만 해당하고 비윤리적인 이에게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벗들이여, 윤리적인 이의 소원은 청정 때문에 이루어집니다. 또 벗들이여, 어떤 이는 수행자나 바라문에게 음식과 음료부터 … 침상과 거처와 등불까지 주며 되돌아올 것을 기대합니다.”
So taṁ cittaṁ dahati, taṁ cittaṁ adhiṭṭhāti, taṁ cittaṁ bhāveti, tassa taṁ cittaṁ hīne vimuttaṁ uttari abhāvitaṁ tatrūpapattiyā saṁvattati. Tañca kho sīlavato vadāmi no dussīlassa. Ijjhatāvuso, sīlavato cetopaṇidhi visuddhattā. Puna caparaṁ, āvuso, idhekacco dānaṁ deti samaṇassa vā brāhmaṇassa vā annaṁ pānaṁ …pe… seyyāvasathapadīpeyyaṁ. So yaṁ deti taṁ paccāsīsati.
디가 니까야 DN 33 상기띠경 (Saṅgītisutta)배경
네 큰 왕의 신들 가운데 태어나려는 생각도 정하고 안정시키고 거듭 길러질 때 그곳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더 높은 데까지 마음을 기르지 않았다는 평가와 윤리적인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제한이 다시 붙습니다. 청정한 삶이 소원의 성취 조건임을 되풀이한 뒤, 셋째부터 일곱째까지의 신적 세계를 압축해 말할 다음 사례가 시작됩니다. 물품 목록은 생략되어도 음식에서 등불까지의 범위가 유지되고, 주는 사람이 보답을 기대한다는 동기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묵상
바라는 곳이 더 화려해져도 마음을 기르는 방식과 윤리의 조건이 같다는 점은 어떻게 들리나요? 목표의 높낮이보다 지금의 생활이 그 바람과 어울리는지를 묻는다면 무엇을 살펴보게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