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일곱째 상실입니다. 또 여래가 나타나 가르침을 설하지만 … 중심 지역에 태어난 어떤 이는 지혜가 없고 둔하며 말이 어눌해, 좋은 말과 나쁜 말의 뜻을 가려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여덟째 상실입니다. 또 벗들이여, 세상에 아라한이며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여래가 나타나지 않은 때가 있습니다.”
Ayaṁ sattamo akkhaṇo asamayo brahmacariyavāsāya. Puna caparaṁ …pe… majjhimesu janapadesu paccājāto hoti. So ca hoti duppañño jaḷo eḷamūgo, nappaṭibalo subhāsitadubbhāsitānamatthamaññātuṁ. Ayaṁ aṭṭhamo akkhaṇo asamayo brahmacariyavāsāya. Puna caparaṁ, āvuso, tathāgato ca loke na uppanno hoti arahaṁ sammāsambuddho,
디가 니까야 DN 33 상기띠경 (Saṅgītisutta)배경
그릇된 견해를 지닌 경우가 일곱째로 확정된 뒤, 여덟째도 중심 지역에 태어난 사람을 다룹니다. 이번에는 관점보다 이해 능력이 문제입니다. 지혜가 없고 둔하며 말이 어눌해, 잘 말한 것과 잘못 말한 것의 뜻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가르침과 접근성은 있어도 분별 능력이 받쳐 주지 않는 경우입니다. 아홉째에서는 조건이 역전됩니다. 개인의 자질을 말하기 전에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여래가 세상에 아예 나타나지 않았다고 밝히며, 시대 자체가 가르침을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를 엽니다.
묵상
좋은 말과 나쁜 말의 뜻을 가리는 능력은 지식의 양과 어떻게 다를까요? 이해가 어려운 사람을 낮춰 보지 않으면서, 서로의 분별을 돕기 위해 설명과 질문을 어떻게 더 접근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