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탐색과 세 흐린 의도를 놓다

감각·존재·수행의 삶에 대한 탐색을 놓고 감각적·악의적·해치려는 의도를 버림

“벗들이여, 수행자는 감각적 즐거움과 계속 존재하기를 찾는 일을 버리고 수행의 삶을 찾는 일도 가라앉혔습니다. 벗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자는 모든 탐색을 놓았습니다. 벗들이여, 수행자가 흐리지 않은 의도를 지닌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벗들이여, 수행자는 감각적 의도·악의·해치려는 의도를 버렸습니다. 벗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자는 흐리지 않은 의도를 지닙니다. 벗들이여, 수행자가 몸의 작용을 고요히 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Idhāvuso, bhikkhuno kāmesanā pahīnā hoti, bhavesanā pahīnā hoti, brahmacariyesanā paṭippassaddhā. Evaṁ kho, āvuso, bhikkhu samavayasaṭṭhesano hoti. Kathañcāvuso, bhikkhu anāvilasaṅkappo hoti? Idhāvuso, bhikkhuno kāmasaṅkappo pahīno hoti, byāpādasaṅkappo pahīno hoti, vihiṁsāsaṅkappo pahīno hoti. Evaṁ kho, āvuso, bhikkhu anāvilasaṅkappo hoti. Kathañcāvuso, bhikkhu passaddhakāyasaṅkhāro hoti?

디가 니까야 DN 33 상기띠경 (Saṅgītisutta)

배경

여섯째 거처는 세 탐색을 끝낸 상태입니다. 감각적 즐거움을 찾는 일과 계속 존재하기를 찾는 일은 버렸고, 수행의 삶을 찾는 일도 이미 목적을 이루어 가라앉았습니다. 이는 수행을 포기했다는 뜻이 아니라 더는 찾아 헤맬 필요가 없는 완성을 가리킵니다. 일곱째는 의도의 맑음입니다. 감각적 즐거움을 향한 의도, 악의, 해치려는 의도 세 가지를 버렸기에 마음의 방향이 흐리지 않습니다. 이어 여덟째인 몸의 작용이 고요해지는 상태를 묻고 넷째 선정으로 답할 준비를 합니다.

묵상

무언가를 찾는 일이 필요해서 끝나는 때와 지쳐서 포기하는 때는 어떻게 다를까요? 자신의 상태를 단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감각적 의도·악의·해치려는 의도 가운데 하나가 잦아들면 마음의 방향이 어떻게 맑아질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