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하는 이들이 알아듣지 못하리라는 망설임

집착을 즐기는 사람들이 연기와 열반을 보기 어려워 설법이 피로와 괴로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집착을 즐기고, 집착을 기뻐하며 집착에 만족하느니라. 그들에게는 특정한 조건성인 연기를 보기 어려우며, 모든 조건 지어진 것의 고요, 모든 집착의 놓아 버림, 갈애의 소멸, 빛바램, 소멸, 열반도 보기 어렵느니라. 내가 가르침을 설하더라도 다른 이들이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게 피로요 괴로움이 되리라.”

Ālayarāmā kho panāyaṁ pajā ālayaratā ālayasammuditā. Ālayarāmāya kho pana pajāya ālayaratāya ālayasammuditāya duddasaṁ idaṁ ṭhānaṁ yadidaṁ idappaccayatāpaṭiccasamuppādo. Idampi kho ṭhānaṁ duddasaṁ yadidaṁ sabbasaṅkhārasamatho sabbūpadhipaṭinissaggo taṇhākkhayo virāgo nirodho nibbānaṁ. Ahañceva kho pana dhammaṁ deseyyaṁ; pare ca me na ājāneyyuṁ; so mamassa kilamatho, sā mamassa vihesā”ti.

상윳따 니까야 SN 6.1 범천의 청원경 (Brahmāyācanasutta)

배경

세존의 생각이 듣는 이들의 상태로 옮겨 갑니다. 사람들은 집착을 즐기고 사랑하며 만족하기 때문에 특정한 조건성인 연기를 보기 어렵다고 세 차례의 집착 표현으로 짚습니다. 이어 모든 형성 작용의 고요부터 열반까지 두 번째로 보기 어려운 대상을 열거합니다. 마지막은 조건문입니다. 설하더라도 다른 이들이 알아듣지 못한다면 피로와 괴로움이 되리라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다”는 확정이 아니라, 알아듣지 못할 경우를 헤아린 망설임입니다.

묵상

이 대목의 망설임은 가르침이 어렵다는 점과 사람들이 집착을 즐긴다는 점을 함께 놓습니다. 두 이유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또렷하게 들리나요?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를 떠안을 필요 없이, 조건문으로 열린 생각만 보아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