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난다여, 개인에게 하는 보시에는 열넷 가지가 있나니.
무엇이 열넷인가?
여래·아라한·완전히 깨달은 이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개인에게 하는 첫째 보시니라.
홀로 깨달은 이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둘째 보시니라.
여래의 제자로서 아라한인 이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셋째 보시니라.
Cuddasa kho panimānanda,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Katamā cuddasa? Tathāgate arahante sammāsambuddhe dānaṁ deti— ayaṁ paṭhamā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Paccekasambuddhe dānaṁ deti— ayaṁ dutiyā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Tathāgatasāvake arahante dānaṁ deti— ayaṁ tatiyā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세존께서는 이제 은혜의 문답을 넘어 이 경의 본론, 곧 보시의 분석으로 들어가십니다. 개인에게 하는 보시 열넷 가지를 “무엇이 열넷인가”라는 질문으로 열고 하나씩 세십니다. 순서는 깨달음의 등급을 따라 높은 자리부터 내려오니, 스스로 완전히 깨달아 가르침을 편 여래, 스승 없이 홀로 깨달았으나 가르침을 펴지 않는 홀로 깨달은 이, 여래의 가르침을 따라 번뇌를 다한 제자인 아라한 순입니다. 이 순서 자체가 뒤에 나올 결실의 크기와 그대로 맞물립니다.
묵상
보시를 받을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마음가짐이 달라진 적이 있나요? 그 차이는 상대를 낮추거나 높이는 마음에서 온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무엇에서 온 것일까요? 천천히 떠올려 보세요.
“아라한과를 실현하려 나아가는 이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넷째 보시니라.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이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다섯째 보시니라.
아나함과를 실현하려 나아가는 이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여섯째 보시니라.
한 번만 돌아오는 이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일곱째 보시니라.
Arahatta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e dānaṁ deti— ayaṁ catutthī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Anāgāmissa dānaṁ deti— ayaṁ pañcamī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Anāgām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e dānaṁ deti— ayaṁ chaṭṭhī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Sakadāgāmissa dānaṁ deti— ayaṁ sattamī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넷째부터 일곱째까지 이어지는 이 편은 하나의 짝을 이룹니다. 아라한이라는 결실을 실현하려 나아가는 이와 이미 다시 돌아오지 않는 아나함, 다시 그 결실을 향해 나아가는 이와 이미 한 번만 돌아오는 사다함이 번갈아 놓입니다. 이렇게 “향해 나아가는 이”와 “이미 이른 이”를 짝지어 세는 방식은 이 경 전체의 틀이며, 뒤에 나오는 상대적 결실 목록에서 왜 향해 나아가는 이의 보시조차 헤아릴 수 없이 크다고 하는지 이해하는 바탕이 됩니다.
묵상
아직 다다르지 못했지만 그 길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과, 이미 그 자리에 이른 사람. 둘을 대하는 마음에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 같나요? 둘 다 소중하게 여겨질 수 있을까요?
“사다함과를 실현하려 나아가는 이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여덟째 보시니라.
수다원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아홉째 보시니라.
수다원과를 실현하려 나아가는 이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열째 보시니라.
부처님의 가르침 밖에 있으면서도
감각적 욕망을 여읜 이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열한째 보시니라.
Sakadāgām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e dānaṁ deti— ayaṁ aṭṭhamī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Sotāpanne dānaṁ deti— ayaṁ navamī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Sotāpatt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e dānaṁ deti— ayaṁ dasamī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Bāhirake kāmesu vītarāge dānaṁ deti— ayaṁ ekādasamī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여덟째와 아홉째와 열째는 앞 편과 같은 틀로 사다함과 수다원의 자리를 채웁니다. 이로써 향해 나아가는 이와 이미 이른 이의 짝이 아라한부터 수다원까지 모두 갖추어집니다. 열한째는 이 틀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가르침 밖에 있으면서도 감각적 욕망을 여읜 이”를 듭니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을 만나지 못했어도 스스로 선정을 닦아 감각적 욕망을 넘어선 이를 가리키며, 아직 완전한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범부 가운데서는 가장 높은 자리에 놓입니다.
묵상
어느 가르침 안에 있느냐보다 실제로 무엇을 넘어섰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얼마나 공감이 가나요? 이름이나 소속과 상관없이 그 사람 자체를 보려 했던 경험이 있다면 떠올려 보세요.
“계행을 갖춘 범부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열두째 보시니라.
계행이 나쁜 범부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열셋째 보시니라.
짐승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열넷째 보시니라.”
Puthujjanasīlavante dānaṁ deti— ayaṁ dvādasamī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Puthujjanadussīle dānaṁ deti— ayaṁ terasamī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Tiracchānagate dānaṁ deti— ayaṁ cuddasamī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ti.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개인에게 하는 보시 열넷 가지 목록의 마지막 세 자리입니다. 계행을 갖춘 범부와 계행이 나쁜 범부를 먼저 가르고, 마지막으로 짐승을 듭니다. 짐승을 열넷 가지 가운데 하나로 굳이 넣은 것은, 이 목록이 애초에 “보시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만 골라 도우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주는 대상에 따라 결실의 크기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남김없이 보여 주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편에서 이 열넷 가지 각각의 결실이 몇 곱절인지 이어집니다.
묵상
받을 자격이 있는지 먼저 따지고 나서야 마음을 낼 수 있었던 적이 있나요? 자격을 따지는 마음과 그저 마음을 내는 것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 오는 것일까요? 둘 다 나쁜 마음은 아닐 거예요.
“아난다여, 짐승에게 보시하면 백 곱절의 결실을,
계행이 나쁜 범부에게는 천 곱절을,
계행을 갖춘 범부에게는 십만 곱절을,
감각적 욕망을 여읜 외도에게는 백억 곱절의 결실을 기대할 수 있느니라.
수다원과를 실현하려 나아가는 이에게 보시한 결실은
헤아릴 수도 잴 수도 없나니,
하물며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홀로 깨달은 이,
또 여래·아라한·완전히 깨달은 이에게 보시함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Tatrānanda, tiracchānagate dānaṁ datvā sataguṇā dakkhiṇā pāṭikaṅkhitabbā, puthujjanadussīle dānaṁ datvā sahassaguṇā dakkhiṇā pāṭikaṅkhitabbā, puthujjanasīlavante dānaṁ datvā satasahassaguṇā dakkhiṇā pāṭikaṅkhitabbā, bāhirake kāmesu vītarāge dānaṁ datvā koṭisatasahassaguṇā dakkhiṇā pāṭikaṅkhitabbā, sotāpatt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e dānaṁ datvā asaṅkheyyā appameyyā dakkhiṇā pāṭikaṅkhitabbā, ko pana vādo sotāpanne, ko pana vādo sakadāgām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e, ko pana vādo sakadāgāmissa, ko pana vādo anāgām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e, ko pana vādo anāgāmissa, ko pana vādo arahatta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e, ko pana vādo arahante, ko pana vādo paccekasambuddhe, ko pana vādo tathāgate arahante sammāsambuddhe.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이 편은 앞서 나온 열넷 자리 각각의 결실을 곱절로 매깁니다. 낮은 넷은 백 곱절, 천 곱절, 십만 곱절, 백억 곱절로 수를 밝히지만, 수다원과를 실현하려 나아가는 이부터는 “헤아릴 수도 잴 수도 없다”고 하여 수의 셈을 아예 넘어섭니다. 그 뒤 원문은 “하물며 무엇이랴”는 구절을 아홉 번 되풀이하며 수다원, 사다함을 향해 나아가는 이, 사다함, 아나함을 향해 나아가는 이, 아나함, 아라한을 향해 나아가는 이, 아라한, 홀로 깨달은 이, 여래의 순서로 층을 오릅니다. 이 편에서는 그 아홉 단계를 한 흐름으로 묶어 옮겼습니다.
묵상
어느 지점부터는 숫자로 셀 수 없다는 이 표현을 읽을 때, 무엇이 떠오르나요? 삶에서 곱절로 잴 수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굳이 답을 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