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맛지마 니까야 MN 142

인용된 가르침 24구절

이 경을 7개 대목으로 나누어 읽습니다.

1 고따미 이모의 옷감 공양 3구절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손수 지은 옷을 세존께 올리려 하자, 세존께서는 승가에 드리라고 이르십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느니라. 한때 세존께서는 사꺼족 사람들 곁, 까삘라왓투의 니그로다 숲에 머무르셨느니라. 그때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새 옷 한 벌을 지어 들고 세존께 다가가 절하고 한쪽에 앉아 이렇게 여쭈었느니라.

Evaṁ me sutaṁ— ekaṁ samayaṁ bhagavā sakkesu viharati kapilavatthusmiṁ nigrodhārāme. Atha kho mahāpajāpati gotamī navaṁ dussayugaṁ ādāya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ṁ abhivādetvā ekamantaṁ nisīdi. Ekamantaṁ nisinnā kho mahāpajāpati gotamī bhagavantaṁ etadavoca: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이 경은 세존께서 사꺼족의 까삘라왓투, 니그로다 숲에 머무르실 때 설해졌습니다.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세존의 이모이며, 생모 마하마야가 일찍 세상을 뜬 뒤 세존을 직접 젖 먹여 기른 이입니다. 그런 그가 손수 잣고 손수 짠 새 옷 한 벌을 들고 세존께 다가가 한쪽에 앉는 장면으로 경이 시작됩니다. 이 만남이 이어지는 문답, 곧 개인에게 하는 보시와 승가에 하는 보시 가운데 무엇이 더 큰 결실을 맺는가 하는 가르침 전체의 배경이 됩니다.

묵상

가까운 이를 위해 정성껏 준비한 것을 전하고 싶었던 경험이 있나요? 그 마음을 어디에, 누구에게 두어야 할지 스스로 정하지 못했던 순간이 있었다면, 그때 느낀 것은 무엇이었나요? 지금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 새 옷 한 벌은, 세존이시여, 제가 손수 잣고 손수 짜서 세존을 위해 마련한 것이니이다. 연민을 베푸시어 받아 주소서.” 이렇게 여쭙자 세존께서는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에게 이렇게 이르셨느니라. “고따미여, 승가에 드리라. 그대가 승가에 보시하면 나도 예경받고 승가도 예경받을 것이니라.”

“idaṁ me, bhante, navaṁ dussayugaṁ bhagavantaṁ uddissa sāmaṁ kantaṁ sāmaṁ vāyitaṁ. Taṁ me, bhante, bhagavā paṭiggaṇhātu anukampaṁ upādāyā”ti. Evaṁ vutte, bhagavā mahāpajāpatiṁ gotamiṁ etadavoca: “saṅghe, gotami, dehi. Saṅghe te dinne ahañceva pūjito bhavissāmi saṅgho cā”ti.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고따미의 청은 “세존을 위해” 손수 마련했다는 한 사람을 향한 정성과 “연민을 베푸시어 받아 주소서”라는 겸손한 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세존의 답은 그 정성을 물리치는 말씀이 아니라 받는 자리를 옮기라는 말씀입니다. “승가에 드리십시오”라는 권유 뒤에는 “그대가 승가에 보시하면 나도 예경받고 승가도 예경받을 것입니다”라는 이유가 따릅니다. 개인을 향한 보시와 승가를 향한 보시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크게 자라는가 하는 이 경 전체의 물음이 여기서 처음 모습을 드러냅니다.

묵상

누군가 나만을 위해 준비한 것을 다른 곳으로 돌려 달라고 한다면, 그 말을 거절로 느낄 것 같나요, 다른 뜻으로 느낄 것 같나요? 받는 이가 자리를 옮기자고 할 때, 정성 자체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두 번째로도, 세 번째로도 같은 말로 세존께 청하였으나 세존께서는 그때마다 같은 말씀으로 답하셨느니라. “고따미여, 승가에 드리라. 그대가 승가에 보시하면 나도 예경받고 승가도 예경받을 것이니라.”

Dutiyampi kho mahāpajāpati gotamī bhagavantaṁ etadavoca: “idaṁ me, bhante, navaṁ dussayugaṁ bhagavantaṁ uddissa sāmaṁ kantaṁ sāmaṁ vāyitaṁ. Taṁ me, bhante, bhagavā paṭiggaṇhātu anukampaṁ upādāyā”ti. Dutiyampi kho bhagavā mahāpajāpatiṁ gotamiṁ etadavoca: “saṅghe, gotami, dehi. Saṅghe te dinne ahañceva pūjito bhavissāmi saṅgho cā”ti. Tatiyampi kho mahāpajāpati gotamī bhagavantaṁ etadavoca: “idaṁ me, bhante, navaṁ dussayugaṁ bhagavantaṁ uddissa sāmaṁ kantaṁ sāmaṁ vāyitaṁ. Taṁ me, bhante, bhagavā paṭiggaṇhātu anukampaṁ upādāyā”ti. Tatiyampi kho bhagavā mahāpajāpatiṁ gotamiṁ etadavoca: “saṅghe, gotami, dehi. Saṅghe te dinne ahañceva pūjito bhavissāmi saṅgho cā”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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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경의 원문은 같은 청과 같은 답을 한 글자도 다르지 않게 두 번 더 되풀이합니다. 이 되풀이는 지루한 반복이 아니라, 고따미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음과 세존의 뜻도 흔들리지 않았음을 함께 보여 주는 정형구입니다. 세 번을 거듭 청하고 세 번을 거듭 같은 답을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뒤에 이어질 아난다의 개입이 단순한 변덕이 아니라 세 번 확인된 뜻을 향한 것임을 알려 줍니다.

묵상

같은 청을 세 번 되풀이했다는 대목을 읽을 때, 지루하게 느껴지나요, 아니면 그만큼 진심이 무겁게 느껴지나요? 무언가를 세 번 거듭 청해 본 경험이 있다면, 그때 마음은 어떠했나요?

2 그 은혜는 갚을 수 없다 3구절

아난다가 고따미의 은혜를 아뢰자, 세존께서는 그 은혜가 쉽게 갚아지지 않는다고 이르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느니라. “세존이시여,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의 새 옷 한 벌을 받아 주소서.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세존께 큰 은혜를 베푼 이, 세존의 이모로서 기르고 먹이고 젖을 먹인 이이니이다. 생모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자신의 젖으로 세존을 먹였나이다. 세존께서도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나이다.”

Evaṁ vutte, āyasmā ānando bhagavantaṁ etadavoca: “paṭiggaṇhātu, bhante, bhagavā mahāpajāpatiyā gotamiyā navaṁ dussayugaṁ. Bahūpakārā, bhante, mahāpajāpati gotamī bhagavato mātucchā āpādikā posikā khīrassa dāyikā; bhagavantaṁ janettiyā kālaṅkatāya thaññaṁ pāyesi. Bhagavāpi, bhante, bahūpakāro mahāpajāpatiyā gotamiy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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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세존께서 세 번째로도 승가에 드리라 이르신 뒤, 아난다 존자가 나서서 고따미의 옷을 받아 주시기를 청합니다. 아난다는 그 근거로 고따미가 세존의 이모로서 길러 주고 먹여 주고 생모가 세상을 뜬 뒤 손수 젖을 먹인 사실을 듭니다. 이어 “세존께서도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라는 말로, 은혜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만 흐른 것이 아니라 서로 오갔음을 밝힙니다. 이는 다음 대목에서 그 은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히기 위한 발판입니다.

묵상

누군가를 대신해 무언가를 청해 본 적이 있나요? 그 사람이 받은 은혜를 말로 옮기려 했을 때, 다 담아지지 않는다고 느낀 부분이 있었나요? 말로는 다 못 담아도 괜찮고, 지금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세존이시여, 세존으로 인해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부처님께, 가르침에, 승가에 귀의하였나이다. 세존으로 인해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은 것을 갖지 않고, 삿된 음행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취하게 하는 것을 마시지 않게 되었나이다.

Bhagavantaṁ, bhante, āgamma mahāpajāpati gotamī buddhaṁ saraṇaṁ gatā, dhammaṁ saraṇaṁ gatā, saṅghaṁ saraṇaṁ gatā. Bhagavantaṁ, bhante, āgamma mahāpajāpati gotamī pāṇātipātā paṭiviratā adinnādānā paṭiviratā kāmesumicchācārā paṭiviratā musāvādā paṭiviratā surāmerayamajjapamādaṭṭhānā paṭivirat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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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아난다는 앞서 고따미가 세존께 베푼 은혜를 말한 데 이어, 이번에는 세존께서 고따미에게 베푸신 은혜를 순서대로 아룁니다. 그 첫째는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라는 세 보배에 귀의하게 된 것이고, 둘째는 살생과 투도와 사음과 거짓말과 음주라는 다섯 계율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이 둘을 모두 “세존으로 인해”라는 같은 구절로 열어, 고따미가 지금 지닌 믿음과 절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밝힙니다. 다음 편에서 나머지 두 은혜가 이어집니다.

묵상

지금 나를 이루고 있는 것 가운데, 다른 한 사람으로 인해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 있나요? 그 사람에게 아직 다 갚지 못한 것이 있다고 느껴진다면, 그 마음은 어떤 모양인가요? 서두르지 않고 떠올려 보세요.

“세존으로 인해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갖추고 성스러운 이들이 사랑하는 계행을 갖추었나이다. 세존으로 인해 괴로움과 그 일어남과 소멸과 소멸에 이르는 길에 의심이 없나이다. 세존께서도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나이다.”

Bhagavantaṁ, bhante, āgamma mahāpajāpati gotamī buddhe aveccappasādena samannāgatā, dhamme aveccappasādena samannāgatā, saṅghe aveccappasādena samannāgatā ariyakantehi sīlehi samannāgatā. Bhagavantaṁ, bhante, āgamma mahāpajāpati gotamī dukkhe nikkaṅkhā, dukkhasamudaye nikkaṅkhā, dukkhanirodhe nikkaṅkhā, dukkhanirodhagāminiyā paṭipadāya nikkaṅkhā. Bhagavāpi, bhante, bahūpakāro mahāpajāpatiyā gotamiyā”ti.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아난다가 드는 네 가지 은혜 가운데 나머지 둘입니다. 셋째는 세 보배에 흔들림 없는 믿음과 성스러운 이들이 사랑하는 계행을 갖추게 된 것이고, 넷째는 괴로움(두카)과 그 일어남과 소멸과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네 가지 진리에 의심이 없게 된 것입니다. 아난다는 이 목록을 “세존께서도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나이다”라는 같은 말로 다시 닫아, 이 네 가지 은혜가 앞서 든 고따미의 은혜에 대한 응답임을 분명히 합니다.

묵상

의심이 사라지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생겼던 순간이 있었나요? 그 순간을 열어 준 사람이나 계기가 있었다면, 그 존재에게 아직 다 갚지 못한 것이 남아 있다고 느껴지나요? 답이 없어도 괜찮아요.

3 은혜는 예경과 공양으로 갚아지지 않는다 2구절

세존께서는 귀의와 계행과 믿음과 의심 없음을 열어 준 은혜가 절과 공양만으로는 갚아지지 않는다고 이르십니다.

“참으로 그러하니라, 아난다여. 어떤 이로 인해 한 사람이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귀의하게 되었다면, 절하고 일어나 맞이하고 합장하며 예의를 갖추는 것으로도, 가사와 탁발 음식과 거처와 병에 필요한 약을 올리는 것으로도 그 은혜는 쉽게 갚아지지 않느니라. 어떤 이로 인해 한 사람이 살생과 투도와 사음과 거짓말과 음주를 끊게 되었다면 그 은혜도 마찬가지로 쉽게 갚아지지 않느니라.

“Evametaṁ, ānanda. Yaṁ hānanda, puggalo puggalaṁ āgamma buddhaṁ saraṇaṁ gato hoti, dhammaṁ saraṇaṁ gato hoti, saṅghaṁ saraṇaṁ gato hoti, imassānanda, puggalassa iminā puggalena na suppatikāraṁ vadāmi, yadidaṁ— abhivādanapaccuṭṭhānaañjalikammasāmīcikammacīvarapiṇḍapātasenāsanagilānappaccayabhesajjaparikkhārānuppadānena. Yaṁ hānanda, puggalo puggalaṁ āgamma pāṇātipātā paṭivirato hoti, adinnādānā paṭivirato hoti, kāmesumicchācārā paṭivirato hoti, musāvādā paṭivirato hoti, surāmerayamajjapamādaṭṭhānā paṭivirato hoti, imassānanda, puggalassa iminā puggalena na suppatikāraṁ vadāmi, yadidaṁ— abhivādanapaccuṭṭhānaañjalikammasāmīcikammacīvarapiṇḍapātasenāsanagilānappaccayabhesajjaparikkhārānuppadānena.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세존께서는 아난다의 말을 그대로 받아 “참으로 그러하니라”로 답하신 뒤, 갚을 수 없는 은혜의 목록을 하나씩 짚으십니다. 첫째는 삼보에 귀의하게 해 준 은혜, 둘째는 다섯 계율을 지니게 해 준 은혜입니다. 두 경우 모두 갚는 방법으로 절하고 일어나 맞이하고 합장하며 예의를 갖추는 것과 가사·탁발 음식·거처·병에 필요한 약을 올리는 것을 나란히 들고, 그 어느 쪽으로도 “쉽게 갚아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원문은 이 은혜 갚기 어려움의 구절을 네 항목 모두에 그대로 되풀이하는데, 이 편에서는 앞의 두 항목을 다루었습니다.

묵상

누군가 나에게 지금의 방향을 잡아 준 은혜가 있다면, 절이나 선물로 그 무게가 다 갚아진다고 느껴지나요? 갚아지지 않는 은혜 앞에서, 사람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답이 바로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어떤 이로 인해 한 사람이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흔들림 없는 믿음과 성스러운 이들이 사랑하는 계행을 갖추게 되었다면 그 은혜도 쉽게 갚아지지 않느니라. 어떤 이로 인해 한 사람이 괴로움과 그 일어남과 소멸과 소멸에 이르는 길에 의심이 없게 되었다면, 절하고 일어나 맞이하고 합장하며 예의를 갖추는 것으로도, 가사와 탁발 음식과 거처와 병에 필요한 약을 올리는 것으로도 그 은혜는 쉽게 갚아지지 않느니라.”

Yaṁ hānanda, puggalo puggalaṁ āgamma buddhe aveccappasādena samannāgato hoti, dhamme … saṅghe … ariyakantehi sīlehi samannāgato hoti, imassānanda, puggalassa iminā puggalena na suppatikāraṁ vadāmi, yadidaṁ— abhivādanapaccuṭṭhānaañjalikammasāmīcikammacīvarapiṇḍapātasenāsanagilānappaccayabhesajjaparikkhārānuppadānena. Yaṁ hānanda, puggalo puggalaṁ āgamma dukkhe nikkaṅkho hoti, dukkhasamudaye nikkaṅkho hoti, dukkhanirodhe nikkaṅkho hoti, dukkhanirodhagāminiyā paṭipadāya nikkaṅkho hoti, imassānanda, puggalassa iminā puggalena na suppatikāraṁ vadāmi, yadidaṁ— abhivādanapaccuṭṭhānaañjalikammasāmīcikammacīvarapiṇḍapātasenāsanagilānappaccayabhesajjaparikkhārānuppadānena.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앞 편에 이어 나머지 두 은혜, 곧 삼보에 흔들림 없는 믿음과 계행을 갖추게 해 준 은혜와 네 가지 진리에 의심이 없게 해 준 은혜를 마저 짚으십니다. 원문은 “dhamme … saṅghe …”처럼 앞서 나온 낱말을 생략 표시로 줄여, 부처님·가르침·승가 세 자리 모두에 같은 서술이 적용됨을 보입니다. 이로써 아난다가 든 네 가지 은혜, 곧 귀의·계율·믿음과 계행·의심 없음 모두에 “쉽게 갚아지지 않는다”는 같은 판단이 내려집니다. 예경과 공양이 헛되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것만으로 셈이 끝나는 은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묵상

의심이 사라지고 방향이 분명해졌던 순간을 누군가 열어 주었다면, 그 값을 매길 수 있을 것 같나요? 갚을 길 없는 은혜를 마음에 담아 두는 것과, 억지로 셈을 맞추려 하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요?

4 개인에게 하는 보시 열넷 가지 5구절

세존께서는 누구에게 보시하느냐에 따라 열넷 가지로 나뉘는 개인 보시를 밝히십니다.

“아난다여, 개인에게 하는 보시에는 열넷 가지가 있나니. 무엇이 열넷인가? 여래·아라한·완전히 깨달은 이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개인에게 하는 첫째 보시니라. 홀로 깨달은 이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둘째 보시니라. 여래의 제자로서 아라한인 이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셋째 보시니라.

Cuddasa kho panimānanda,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Katamā cuddasa? Tathāgate arahante sammāsambuddhe dānaṁ deti— ayaṁ paṭhamā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Paccekasambuddhe dānaṁ deti— ayaṁ dutiyā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Tathāgatasāvake arahante dānaṁ deti— ayaṁ tatiyā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세존께서는 이제 은혜의 문답을 넘어 이 경의 본론, 곧 보시의 분석으로 들어가십니다. 개인에게 하는 보시 열넷 가지를 “무엇이 열넷인가”라는 질문으로 열고 하나씩 세십니다. 순서는 깨달음의 등급을 따라 높은 자리부터 내려오니, 스스로 완전히 깨달아 가르침을 편 여래, 스승 없이 홀로 깨달았으나 가르침을 펴지 않는 홀로 깨달은 이, 여래의 가르침을 따라 번뇌를 다한 제자인 아라한 순입니다. 이 순서 자체가 뒤에 나올 결실의 크기와 그대로 맞물립니다.

묵상

보시를 받을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마음가짐이 달라진 적이 있나요? 그 차이는 상대를 낮추거나 높이는 마음에서 온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무엇에서 온 것일까요? 천천히 떠올려 보세요.

“아라한과를 실현하려 나아가는 이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넷째 보시니라.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이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다섯째 보시니라. 아나함과를 실현하려 나아가는 이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여섯째 보시니라. 한 번만 돌아오는 이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일곱째 보시니라.

Arahatta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e dānaṁ deti— ayaṁ catutthī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Anāgāmissa dānaṁ deti— ayaṁ pañcamī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Anāgām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e dānaṁ deti— ayaṁ chaṭṭhī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Sakadāgāmissa dānaṁ deti— ayaṁ sattamī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넷째부터 일곱째까지 이어지는 이 편은 하나의 짝을 이룹니다. 아라한이라는 결실을 실현하려 나아가는 이와 이미 다시 돌아오지 않는 아나함, 다시 그 결실을 향해 나아가는 이와 이미 한 번만 돌아오는 사다함이 번갈아 놓입니다. 이렇게 “향해 나아가는 이”와 “이미 이른 이”를 짝지어 세는 방식은 이 경 전체의 틀이며, 뒤에 나오는 상대적 결실 목록에서 왜 향해 나아가는 이의 보시조차 헤아릴 수 없이 크다고 하는지 이해하는 바탕이 됩니다.

묵상

아직 다다르지 못했지만 그 길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과, 이미 그 자리에 이른 사람. 둘을 대하는 마음에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 같나요? 둘 다 소중하게 여겨질 수 있을까요?

“사다함과를 실현하려 나아가는 이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여덟째 보시니라. 수다원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아홉째 보시니라. 수다원과를 실현하려 나아가는 이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열째 보시니라. 부처님의 가르침 밖에 있으면서도 감각적 욕망을 여읜 이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열한째 보시니라.

Sakadāgām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e dānaṁ deti— ayaṁ aṭṭhamī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Sotāpanne dānaṁ deti— ayaṁ navamī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Sotāpatt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e dānaṁ deti— ayaṁ dasamī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Bāhirake kāmesu vītarāge dānaṁ deti— ayaṁ ekādasamī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여덟째와 아홉째와 열째는 앞 편과 같은 틀로 사다함과 수다원의 자리를 채웁니다. 이로써 향해 나아가는 이와 이미 이른 이의 짝이 아라한부터 수다원까지 모두 갖추어집니다. 열한째는 이 틀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가르침 밖에 있으면서도 감각적 욕망을 여읜 이”를 듭니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을 만나지 못했어도 스스로 선정을 닦아 감각적 욕망을 넘어선 이를 가리키며, 아직 완전한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범부 가운데서는 가장 높은 자리에 놓입니다.

묵상

어느 가르침 안에 있느냐보다 실제로 무엇을 넘어섰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 얼마나 공감이 가나요? 이름이나 소속과 상관없이 그 사람 자체를 보려 했던 경험이 있다면 떠올려 보세요.

“계행을 갖춘 범부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열두째 보시니라. 계행이 나쁜 범부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열셋째 보시니라. 짐승에게 보시하나니, 이것이 열넷째 보시니라.”

Puthujjanasīlavante dānaṁ deti— ayaṁ dvādasamī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Puthujjanadussīle dānaṁ deti— ayaṁ terasamī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 Tiracchānagate dānaṁ deti— ayaṁ cuddasamī pāṭipuggalikā dakkhiṇāti.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개인에게 하는 보시 열넷 가지 목록의 마지막 세 자리입니다. 계행을 갖춘 범부와 계행이 나쁜 범부를 먼저 가르고, 마지막으로 짐승을 듭니다. 짐승을 열넷 가지 가운데 하나로 굳이 넣은 것은, 이 목록이 애초에 “보시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만 골라 도우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주는 대상에 따라 결실의 크기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남김없이 보여 주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편에서 이 열넷 가지 각각의 결실이 몇 곱절인지 이어집니다.

묵상

받을 자격이 있는지 먼저 따지고 나서야 마음을 낼 수 있었던 적이 있나요? 자격을 따지는 마음과 그저 마음을 내는 것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 오는 것일까요? 둘 다 나쁜 마음은 아닐 거예요.

“아난다여, 짐승에게 보시하면 백 곱절의 결실을, 계행이 나쁜 범부에게는 천 곱절을, 계행을 갖춘 범부에게는 십만 곱절을, 감각적 욕망을 여읜 외도에게는 백억 곱절의 결실을 기대할 수 있느니라. 수다원과를 실현하려 나아가는 이에게 보시한 결실은 헤아릴 수도 잴 수도 없나니, 하물며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홀로 깨달은 이, 또 여래·아라한·완전히 깨달은 이에게 보시함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Tatrānanda, tiracchānagate dānaṁ datvā sataguṇā dakkhiṇā pāṭikaṅkhitabbā, puthujjanadussīle dānaṁ datvā sahassaguṇā dakkhiṇā pāṭikaṅkhitabbā, puthujjanasīlavante dānaṁ datvā satasahassaguṇā dakkhiṇā pāṭikaṅkhitabbā, bāhirake kāmesu vītarāge dānaṁ datvā koṭisatasahassaguṇā dakkhiṇā pāṭikaṅkhitabbā, sotāpatt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e dānaṁ datvā asaṅkheyyā appameyyā dakkhiṇā pāṭikaṅkhitabbā, ko pana vādo sotāpanne, ko pana vādo sakadāgām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e, ko pana vādo sakadāgāmissa, ko pana vādo anāgāmi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e, ko pana vādo anāgāmissa, ko pana vādo arahattaphalasacchikiriyāya paṭipanne, ko pana vādo arahante, ko pana vādo paccekasambuddhe, ko pana vādo tathāgate arahante sammāsambuddhe.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이 편은 앞서 나온 열넷 자리 각각의 결실을 곱절로 매깁니다. 낮은 넷은 백 곱절, 천 곱절, 십만 곱절, 백억 곱절로 수를 밝히지만, 수다원과를 실현하려 나아가는 이부터는 “헤아릴 수도 잴 수도 없다”고 하여 수의 셈을 아예 넘어섭니다. 그 뒤 원문은 “하물며 무엇이랴”는 구절을 아홉 번 되풀이하며 수다원, 사다함을 향해 나아가는 이, 사다함, 아나함을 향해 나아가는 이, 아나함, 아라한을 향해 나아가는 이, 아라한, 홀로 깨달은 이, 여래의 순서로 층을 오릅니다. 이 편에서는 그 아홉 단계를 한 흐름으로 묶어 옮겼습니다.

묵상

어느 지점부터는 숫자로 셀 수 없다는 이 표현을 읽을 때, 무엇이 떠오르나요? 삶에서 곱절로 잴 수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굳이 답을 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5 승가에 하는 보시 일곱 가지 3구절

세존께서는 승가 전체를 향한 보시 일곱 가지를 밝히시고, 미래에도 그 결실이 크다고 이르십니다.

“아난다여, 승가에 하는 보시에는 일곱 가지가 있나니. 무엇이 일곱인가? 여래를 우두머리로 하는 남성 수행자와 비구니 두 승가에 보시하나니, 이것이 첫째 보시니라. 여래께서 완전히 열반하신 뒤 두 승가에 보시하나니, 이것이 둘째 보시니라. 남성 수행자 승가에 보시하나니, 이것이 셋째 보시니라. 비구니 승가에 보시하나니, 이것이 넷째 보시니라.

Satta kho panimānanda, saṅghagatā dakkhiṇā. Katamā satta? Buddhappamukhe ubhatosaṅghe dānaṁ deti— ayaṁ paṭhamā saṅghagatā dakkhiṇā. Tathāgate parinibbute ubhatosaṅghe dānaṁ deti— ayaṁ dutiyā saṅghagatā dakkhiṇā. Bhikkhusaṅghe dānaṁ deti— ayaṁ tatiyā saṅghagatā dakkhiṇā. Bhikkhunisaṅghe dānaṁ deti— ayaṁ catutthī saṅghagatā dakkhiṇā.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개인에게 하는 보시를 마친 세존께서는 이제 승가 전체를 향한 보시 일곱 가지로 넘어가십니다. 앞의 둘은 여래께서 계실 때와 완전히 열반하신 뒤로 시간을 가르고, 뒤의 둘은 남성 수행자 승가와 비구니 승가로 대상을 가릅니다. 눈여겨볼 것은 “여래를 우두머리로 하는 두 승가”에 보시함과 “여래께서 완전히 열반하신 뒤” 두 승가에 보시함을 나란히 놓아, 부처님이 계시지 않아도 승가에 하는 보시의 자리가 사라지지 않음을 미리 밝힌 점입니다.

묵상

한 사람이 아니라 어떤 모임이나 공동체 전체를 향해 마음을 낸 적이 있나요? 그때 마음은 한 사람을 향할 때와 어떻게 달랐나요? 떠오르는 것이 없어도 괜찮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승가로부터 나를 위해 이만큼의 남성 수행자와 비구니를 정해 주십시오’ 하고 보시하나니, 이것이 다섯째 보시니라. ‘승가로부터 나를 위해 이만큼의 남성 수행자를 정해 주십시오’ 하고 보시하나니, 이것이 여섯째 보시니라. ‘승가로부터 나를 위해 이만큼의 비구니를 정해 주십시오’ 하고 보시하나니, 이것이 일곱째 보시니라.”

‘Ettakā me bhikkhū ca bhikkhuniyo ca saṅghato uddissathā’ti dānaṁ deti— ayaṁ pañcamī saṅghagatā dakkhiṇā. ‘Ettakā me bhikkhū saṅghato uddissathā’ti dānaṁ deti— ayaṁ chaṭṭhī saṅghagatā dakkhiṇā. ‘Ettakā me bhikkhuniyo saṅghato uddissathā’ti dānaṁ deti— ayaṁ sattamī saṅghagatā dakkhiṇā.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다섯째부터 일곱째까지는 앞의 넷과 결이 다릅니다. 앞의 넷이 승가 전체나 그 반쪽을 향한 보시라면, 이 셋은 보시하는 이가 “이만큼의 인원을 정해 달라”고 승가에 청하여 그 정해진 이들에게 공양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이 여전히 “개인에게 하는 보시”가 아니라 “승가에게 하는 보시”로 분류되는 까닭은, 특정한 이름을 짚어 준 것이 아니라 승가라는 조직이 정하는 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누구인지보다 승가에 맡기는 마음이 이 보시의 성격을 정합니다.

묵상

누구에게 갈지 스스로 고르지 않고 맡겨 버리는 보시와, 정해 놓고 하는 보시는 마음가짐이 어떻게 다를까요? 무언가를 내맡길 때 오히려 마음이 더 가벼워졌던 경험이 있나요? 둘 다 자연스러운 선택이에요.

“아난다여, 미래에는 목에 가사 조각을 걸쳤을 뿐 계행이 나쁘고 못된 것들이 있으리라. 사람들은 그 계행이 나쁜 이들에게 승가를 향해 보시하리니, 그때에도 나는 승가에 하는 보시가 헤아릴 수도 잴 수도 없다고 말하노라. 어떤 방식으로도 승가에 하는 보시보다 개인에게 하는 보시가 더 큰 결실을 맺는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느니라.”

Bhavissanti kho panānanda, anāgatamaddhānaṁ gotrabhuno kāsāvakaṇṭhā dussīlā pāpadhammā. Tesu dussīlesu saṅghaṁ uddissa dānaṁ dassanti. Tadāpāhaṁ, ānanda, saṅghagataṁ dakkhiṇaṁ asaṅkheyyaṁ appameyyaṁ vadāmi. Na tvevāhaṁ, ānanda, kenaci pariyāyena saṅghagatāya dakkhiṇāya pāṭipuggalikaṁ dānaṁ mahapphalataraṁ vadāmi.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세존께서는 승가에 하는 보시가 좋은 시절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승가가 흐트러진 미래에도 그러함을 미리 밝히십니다. “목에 가사 조각을 걸쳤을 뿐 계행이 나쁜” 이들이 나타나 그런 이들에게 승가를 향해 보시하는 때가 오더라도, 그 보시의 결실은 여전히 헤아릴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승가에 하는 보시의 힘이 그 순간 받는 개개인의 자질이 아니라 승가라는 자리 자체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결코 말하지 않느니라”는 단정으로, 이 경의 핵심 결론, 곧 승가에 하는 보시가 개인에게 하는 보시보다 항상 크거나 같다는 것을 못박습니다.

묵상

어떤 자리나 제도가 그 안의 한 사람 한 사람의 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값어치를 지닌다는 생각에, 어디까지 동의할 수 있나요? 사람에게 실망하고도 그 사람이 속한 자리 전체를 등지지는 않았던 경험이 있나요?

6 보시를 맑게 하는 네 가지 길 5구절

세존께서는 주는 이와 받는 이의 계행에 따라 보시가 맑아지는 네 가지 경우를 밝히십니다.

“아난다여, 보시가 맑아지는 데에는 네 가지가 있나니. 무엇이 넷인가? 주는 이로 인해 맑아지고 받는 이로 인해서는 맑아지지 않는 보시가 있고, 받는 이로 인해 맑아지고 주는 이로 인해서는 맑아지지 않는 보시가 있으며, 주는 이로도 받는 이로도 맑아지지 않는 보시가 있고, 주는 이로도 받는 이로도 맑아지는 보시가 있느니라.

Catasso kho imā, ānanda, dakkhiṇā visuddhiyo. Katamā catasso? Atthānanda, dakkhiṇā dāyakato visujjhati no paṭiggāhakato. Atthānanda, dakkhiṇā paṭiggāhakato visujjhati no dāyakato. Atthānanda, dakkhiṇā neva dāyakato visujjhati no paṭiggāhakato. Atthānanda, dakkhiṇā dāyakato ceva visujjhati paṭiggāhakato ca.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승가와 개인, 어디에 보시하는가를 다룬 앞의 두 목록에 이어, 세존께서는 이제 보시가 맑아지는 조건이라는 다른 축으로 넘어가십니다. 이 넷은 주는 이의 계행과 받는 이의 계행이라는 두 요소를 각각 있음과 없음으로 나누어 짠 네 경우, 곧 주는 이만 맑거나, 받는 이만 맑거나, 둘 다 맑지 않거나, 둘 다 맑은 경우입니다. 이는 앞서 다룬 “누구에게 주는가”의 문제와 별개로 “보시라는 행위 자체가 언제 맑다고 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묵상

보시나 선물이 “맑다”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주는 이의 마음과 받는 이의 됨됨이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 왔나요? 둘 다라고 답해도 괜찮고, 아직 모르겠어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보시가 어떻게 주는 이로 인해 맑아지고 받는 이로 인해서는 맑아지지 않는가? 여기 주는 이는 계행을 갖추고 좋은 성품을 지녔으나 받는 이는 계행이 나쁘고 못된 성품을 지녔나니, 아난다여, 이렇게 보시는 주는 이로 인해 맑아지고 받는 이로 인해서는 맑아지지 않느니라.

Kathañcānanda, dakkhiṇā dāyakato visujjhati no paṭiggāhakato? Idhānanda, dāyako hoti sīlavā kalyāṇadhammo, paṭiggāhakā honti dussīlā pāpadhammā— evaṁ kho, ānanda, dakkhiṇā dāyakato visujjhati no paṭiggāhakato.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네 경우 가운데 첫째를 풀어냅니다. 주는 이가 계행을 갖추고 좋은 성품을 지녔는데 받는 이가 계행이 나쁘고 못된 성품을 지녔다면, 보시의 맑음은 주는 이 쪽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는 받는 이의 자질이 나쁘다고 해서 준 이의 선한 마음까지 함께 더럽혀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며, 뒤에 이어질 게송에서 “계행 있는 이가 계행 나쁜 이에게 베풀면 그 보시는 주는 이로 인해 맑아진다”는 형태로 다시 확인됩니다.

묵상

좋은 마음으로 준 것이 뜻대로 쓰이지 않았을 때, 그 마음 자체가 헛되었다고 여겨지나요? 준 이의 마음과 받은 이의 쓰임을 나누어 볼 수 있을까요? 둘 다 사실일 수도 있고, 그래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보시가 어떻게 받는 이로 인해 맑아지고 주는 이로 인해서는 맑아지지 않는가? 여기 주는 이는 계행이 나쁘고 못된 성품을 지녔으나 받는 이는 계행을 갖추고 좋은 성품을 지녔나니, 아난다여, 이렇게 보시는 받는 이로 인해 맑아지고 주는 이로 인해서는 맑아지지 않느니라.

Kathañcānanda, dakkhiṇā paṭiggāhakato visujjhati no dāyakato? Idhānanda, dāyako hoti dussīlo pāpadhammo, paṭiggāhakā honti sīlavanto kalyāṇadhammā— evaṁ kho, ānanda, dakkhiṇā paṭiggāhakato visujjhati no dāyakato.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둘째 경우는 앞 편과 정반대로, 주는 이가 계행이 나쁘고 받는 이가 계행을 갖춘 경우입니다. 이때는 보시의 맑음이 받는 이로부터 옵니다. 이는 “주는 마음이 삐뚤어져 있어도 받는 이가 훌륭하면 그 보시가 헛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는 이와 받는 이 각각의 계행이 보시 전체의 성격에 저마다 다른 몫으로 관여한다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 둘째 경우는 뒤에 이어질 게송에서 “계행 나쁜 이가 계행 있는 이에게 베풀면 그 보시는 받는 이로 인해 맑아진다”는 구절로 다시 나옵니다.

묵상

누군가의 마음이 온전치 못했더라도 그 결과가 좋은 곳에 가닿았다면, 그 일을 어떻게 바라보게 되나요? 결과와 의도를 따로 떼어 보는 것이 가능할까요? 둘 다 함께 볼 수도 있을 거예요.

“아난다여, 보시가 어떻게 주는 이로도 받는 이로도 맑아지지 않는가? 여기 주는 이도 계행이 나쁘고 못된 성품을 지녔고 받는 이도 계행이 나쁘고 못된 성품을 지녔나니, 아난다여, 이렇게 보시는 주는 이로도 받는 이로도 맑아지지 않느니라.

Kathañcānanda, dakkhiṇā neva dāyakato visujjhati no paṭiggāhakato? Idhānanda, dāyako ca hoti dussīlo pāpadhammo, paṭiggāhakā ca honti dussīlā pāpadhammā— evaṁ kho, ānanda, dakkhiṇā neva dāyakato visujjhati no paṭiggāhakato.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셋째 경우는 주는 이와 받는 이 모두 계행이 나쁘고 못된 성품을 지닌 때입니다. 이때는 보시가 어느 쪽으로도 맑아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뒤에 이어질 게송은 이 경우를 두고 “그 보시는 크게 결실을 맺는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넷 가운데 유일하게 결실의 크기를 직접 부정하는 경우로, 이는 특정한 사람을 심판하려는 말씀이 아니라 보시라는 행위가 두 사람의 마음가짐에 함께 걸려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묵상

주고받는 두 마음이 모두 흐트러져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그 기억은 어떤 무게로 남아 있나요? 그런 순간에도 배울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나요? 지금은 답하지 않고 넘어가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보시가 어떻게 주는 이로도 받는 이로도 맑아지는가? 여기 주는 이도 계행을 갖추고 좋은 성품을 지녔고 받는 이도 계행을 갖추고 좋은 성품을 지녔나니, 아난다여, 이렇게 보시는 주는 이로도 받는 이로도 맑아지느니라. 아난다여, 보시가 맑아지는 이 네 가지가 있느니라.”

Kathañcānanda, dakkhiṇā dāyakato ceva visujjhati paṭiggāhakato ca? Idhānanda, dāyako ca hoti sīlavā kalyāṇadhammo, paṭiggāhakā ca honti sīlavanto kalyāṇadhammā— evaṁ kho, ānanda, dakkhiṇā dāyakato ceva visujjhati paṭiggāhakato ca. Imā kho, ānanda, catasso dakkhiṇā visuddhiyo”ti.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넷째이자 마지막 경우로, 주는 이와 받는 이 모두 계행을 갖추고 좋은 성품을 지닌 때입니다. 이때 보시는 두 쪽 모두로 인해 맑아진다고 하십니다. 이로써 네 가지 경우, 곧 주는 이만 맑음, 받는 이만 맑음, 둘 다 맑지 않음, 둘 다 맑음이 모두 갖추어지고, 세존께서는 “보시가 맑아지는 이 네 가지가 있느니라”는 말씀으로 목록을 닫으십니다. 다음 편부터는 이 네 가지를 게송으로 다시 노래하십니다.

묵상

주는 마음과 받는 자리가 함께 맑았던 순간을 떠올릴 수 있나요? 그런 순간이 지금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언젠가 그런 자리를 만나고 싶다는 바람만으로도 이미 충분할 수 있어요.

7 게송으로 다시 이르시다 3구절

세존께서는 산문으로 밝히신 보시의 청정을 게송으로 다시 노래하시고, 경은 여기서 끝맺습니다.

이렇게 세존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선서이신 스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뒤 다시 이렇게 이르셨느니라. “계행 있는 이가 계행 나쁜 이들에게 떳떳하게 얻은 것을 맑은 마음으로 베풀며 업의 결실이 넉넉함을 굳게 믿는다면, 그 보시는 주는 이로 인해 맑아지느니라. 계행 나쁜 이가 계행 있는 이들에게 떳떳하지 않게 얻은 것을 흐린 마음으로 베풀며 업의 결실이 넉넉함을 믿지 않는다면, 그 보시는 받는 이로 인해 맑아지느니라.

Idamavoca bhagavā. Idaṁ vatvāna sugato athāparaṁ etadavoca satthā: “Yo sīlavā dussīlesu dadāti dānaṁ, Dhammena laddhaṁ supasannacitto; Abhisaddahaṁ kammaphalaṁ uḷāraṁ, Sā dakkhiṇā dāyakato visujjhati. Yo dussīlo sīlavantesu dadāti dānaṁ, Adhammena laddhaṁ appasannacitto; Anabhisaddahaṁ kammaphalaṁ uḷāraṁ, Sā dakkhiṇā paṭiggāhakato visujjhati.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산문으로 다 밝히신 뒤, 세존께서는 같은 내용을 게송으로 다시 노래하십니다. 앞서 “주는 이로 인해 맑아짐”과 “받는 이로 인해 맑아짐”을 설명할 때는 계행만 말씀하셨지만, 게송에서는 떳떳하게 얻었는지와 맑은 마음인지, 업의 결실을 믿는지까지 함께 들어 그 안의 결을 더 촘촘히 보여 주십니다. 계행 있는 이가 계행 나쁜 이에게 베풀 때는 주는 쪽의 이 세 가지가 갖추어져 있고, 계행 나쁜 이가 계행 있는 이에게 베풀 때는 그 세 가지가 반대로 흐려져 있다는 대구를 이룹니다.

묵상

무언가를 베풀 때 그 결과를 믿는 마음이 함께 있었는지 돌아본 적이 있나요? 믿음 없이 건넨 것과 믿음을 담아 건넨 것은, 받는 사람에게는 몰라도 나 자신에게는 다르게 남지 않을까요?

“계행 나쁜 이가 계행 나쁜 이들에게 떳떳하지 않게 얻은 것을 흐린 마음으로 베풀며 업의 결실이 넉넉함을 믿지 않는다면, 나는 그 보시가 크게 결실 맺는다고 말하지 않느니라. 계행 있는 이가 계행 있는 이들에게 떳떳하게 얻은 것을 맑은 마음으로 베풀며 업의 결실이 넉넉함을 굳게 믿는다면, 나는 그 보시가 크게 결실 맺는다고 말하느니라.

Yo dussīlo dussīlesu dadāti dānaṁ, Adhammena laddhaṁ appasannacitto; Anabhisaddahaṁ kammaphalaṁ uḷāraṁ, Na taṁ dānaṁ vipulapphalanti brūmi. Yo sīlavā sīlavantesu dadāti dānaṁ, Dhammena laddhaṁ supasannacitto; Abhisaddahaṁ kammaphalaṁ uḷāraṁ, Taṁ ve dānaṁ vipulapphalanti brūmi.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앞 편이 주는 이 또는 받는 이 한쪽만 맑은 두 경우를 노래했다면, 이 편은 둘 다 흐린 경우와 둘 다 맑은 경우를 나란히 노래합니다. 둘 다 계행이 나쁘고 떳떳하지 않게 얻었으며 믿음도 없는 보시는 “크게 결실 맺는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부정으로, 둘 다 계행이 있고 떳떳하게 얻었으며 믿음도 굳은 보시는 “크게 결실 맺는다고 말한다”는 긍정으로 맺습니다. 앞서 산문에서 “둘 다 맑지 않음”과 “둘 다 맑음”이라 부르던 두 경우가 여기서 결실의 크기라는 말로 다시 확인됩니다.

묵상

결실이 크다, 작다는 말을 눈에 보이는 결과로만 헤아려 왔나요? 떳떳하게 얻었는지, 맑은 마음인지, 믿음이 있는지, 이 세 가지 가운데 지금 내게 가장 낯선 물음은 무엇인가요? 천천히 짚어 보세요.

“탐욕을 여읜 이가 탐욕을 여읜 이들에게 떳떳하게 얻은 것을 맑은 마음으로 베풀며 업의 결실이 넉넉함을 굳게 믿는다면, 그 보시야말로 재물로 하는 보시 가운데 으뜸이라고 나는 말하노라.”

Yo vītarāgo vītarāgesu dadāti dānaṁ, Dhammena laddhaṁ supasannacitto; Abhisaddahaṁ kammaphalaṁ uḷāraṁ, Taṁ ve dānaṁ āmisadānānamaggan”ti.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게송의 마지막 짝은 계행이나 떳떳하게 얻음을 넘어, 탐욕을 이미 여읜 이가 탐욕을 여읜 이에게 베푸는 가장 높은 경우를 노래합니다. 이를 두고 세존께서는 “재물로 하는 보시 가운데 으뜸”이라 못박으십니다. 이 편의 마지막 문장은 게송이 아니라 경을 전한 이들이 덧붙인 매듭으로, 이 경이 맛지마 니까야 가운데 열두째 경임을 밝힙니다. 경 자체의 가르침은 앞의 게송에서 이미 끝났고, 이 문장은 전승의 매듭임을 밝혀 둡니다.

묵상

지금 이 순간, 무언가를 완전히 내려놓은 이가 똑같이 내려놓은 이에게 건네는 마음을 그려 볼 수 있나요? 그런 자리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고 해서 지금의 작은 나눔이 의미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