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존께서는 주는 이와 받는 이의 계행에 따라 보시가 맑아지는 네 가지 경우를 밝히십니다.
“아난다여, 보시가 맑아지는 데에는 네 가지가 있나니.
무엇이 넷인가?
주는 이로 인해 맑아지고 받는 이로 인해서는 맑아지지 않는 보시가 있고,
받는 이로 인해 맑아지고 주는 이로 인해서는 맑아지지 않는 보시가 있으며,
주는 이로도 받는 이로도 맑아지지 않는 보시가 있고,
주는 이로도 받는 이로도 맑아지는 보시가 있느니라.
Catasso kho imā, ānanda, dakkhiṇā visuddhiyo. Katamā catasso? Atthānanda, dakkhiṇā dāyakato visujjhati no paṭiggāhakato. Atthānanda, dakkhiṇā paṭiggāhakato visujjhati no dāyakato. Atthānanda, dakkhiṇā neva dāyakato visujjhati no paṭiggāhakato. Atthānanda, dakkhiṇā dāyakato ceva visujjhati paṭiggāhakato ca.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승가와 개인, 어디에 보시하는가를 다룬 앞의 두 목록에 이어, 세존께서는 이제 보시가 맑아지는 조건이라는 다른 축으로 넘어가십니다. 이 넷은 주는 이의 계행과 받는 이의 계행이라는 두 요소를 각각 있음과 없음으로 나누어 짠 네 경우, 곧 주는 이만 맑거나, 받는 이만 맑거나, 둘 다 맑지 않거나, 둘 다 맑은 경우입니다. 이는 앞서 다룬 “누구에게 주는가”의 문제와 별개로 “보시라는 행위 자체가 언제 맑다고 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묵상
보시나 선물이 “맑다”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주는 이의 마음과 받는 이의 됨됨이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 왔나요? 둘 다라고 답해도 괜찮고, 아직 모르겠어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보시가 어떻게 주는 이로 인해 맑아지고
받는 이로 인해서는 맑아지지 않는가?
여기 주는 이는 계행을 갖추고 좋은 성품을 지녔으나
받는 이는 계행이 나쁘고 못된 성품을 지녔나니,
아난다여, 이렇게 보시는 주는 이로 인해 맑아지고
받는 이로 인해서는 맑아지지 않느니라.
Kathañcānanda, dakkhiṇā dāyakato visujjhati no paṭiggāhakato? Idhānanda, dāyako hoti sīlavā kalyāṇadhammo, paṭiggāhakā honti dussīlā pāpadhammā— evaṁ kho, ānanda, dakkhiṇā dāyakato visujjhati no paṭiggāhakato.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네 경우 가운데 첫째를 풀어냅니다. 주는 이가 계행을 갖추고 좋은 성품을 지녔는데 받는 이가 계행이 나쁘고 못된 성품을 지녔다면, 보시의 맑음은 주는 이 쪽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는 받는 이의 자질이 나쁘다고 해서 준 이의 선한 마음까지 함께 더럽혀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며, 뒤에 이어질 게송에서 “계행 있는 이가 계행 나쁜 이에게 베풀면 그 보시는 주는 이로 인해 맑아진다”는 형태로 다시 확인됩니다.
묵상
좋은 마음으로 준 것이 뜻대로 쓰이지 않았을 때, 그 마음 자체가 헛되었다고 여겨지나요? 준 이의 마음과 받은 이의 쓰임을 나누어 볼 수 있을까요? 둘 다 사실일 수도 있고, 그래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보시가 어떻게 받는 이로 인해 맑아지고
주는 이로 인해서는 맑아지지 않는가?
여기 주는 이는 계행이 나쁘고 못된 성품을 지녔으나
받는 이는 계행을 갖추고 좋은 성품을 지녔나니,
아난다여, 이렇게 보시는 받는 이로 인해 맑아지고
주는 이로 인해서는 맑아지지 않느니라.
Kathañcānanda, dakkhiṇā paṭiggāhakato visujjhati no dāyakato? Idhānanda, dāyako hoti dussīlo pāpadhammo, paṭiggāhakā honti sīlavanto kalyāṇadhammā— evaṁ kho, ānanda, dakkhiṇā paṭiggāhakato visujjhati no dāyakato.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둘째 경우는 앞 편과 정반대로, 주는 이가 계행이 나쁘고 받는 이가 계행을 갖춘 경우입니다. 이때는 보시의 맑음이 받는 이로부터 옵니다. 이는 “주는 마음이 삐뚤어져 있어도 받는 이가 훌륭하면 그 보시가 헛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는 이와 받는 이 각각의 계행이 보시 전체의 성격에 저마다 다른 몫으로 관여한다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 둘째 경우는 뒤에 이어질 게송에서 “계행 나쁜 이가 계행 있는 이에게 베풀면 그 보시는 받는 이로 인해 맑아진다”는 구절로 다시 나옵니다.
묵상
누군가의 마음이 온전치 못했더라도 그 결과가 좋은 곳에 가닿았다면, 그 일을 어떻게 바라보게 되나요? 결과와 의도를 따로 떼어 보는 것이 가능할까요? 둘 다 함께 볼 수도 있을 거예요.
“아난다여, 보시가 어떻게 주는 이로도 받는 이로도
맑아지지 않는가?
여기 주는 이도 계행이 나쁘고 못된 성품을 지녔고
받는 이도 계행이 나쁘고 못된 성품을 지녔나니,
아난다여, 이렇게 보시는 주는 이로도 받는 이로도
맑아지지 않느니라.
Kathañcānanda, dakkhiṇā neva dāyakato visujjhati no paṭiggāhakato? Idhānanda, dāyako ca hoti dussīlo pāpadhammo, paṭiggāhakā ca honti dussīlā pāpadhammā— evaṁ kho, ānanda, dakkhiṇā neva dāyakato visujjhati no paṭiggāhakato.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셋째 경우는 주는 이와 받는 이 모두 계행이 나쁘고 못된 성품을 지닌 때입니다. 이때는 보시가 어느 쪽으로도 맑아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뒤에 이어질 게송은 이 경우를 두고 “그 보시는 크게 결실을 맺는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넷 가운데 유일하게 결실의 크기를 직접 부정하는 경우로, 이는 특정한 사람을 심판하려는 말씀이 아니라 보시라는 행위가 두 사람의 마음가짐에 함께 걸려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묵상
주고받는 두 마음이 모두 흐트러져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그 기억은 어떤 무게로 남아 있나요? 그런 순간에도 배울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나요? 지금은 답하지 않고 넘어가도 괜찮아요.
“아난다여, 보시가 어떻게 주는 이로도 받는 이로도
맑아지는가?
여기 주는 이도 계행을 갖추고 좋은 성품을 지녔고
받는 이도 계행을 갖추고 좋은 성품을 지녔나니,
아난다여, 이렇게 보시는 주는 이로도 받는 이로도 맑아지느니라.
아난다여, 보시가 맑아지는 이 네 가지가 있느니라.”
Kathañcānanda, dakkhiṇā dāyakato ceva visujjhati paṭiggāhakato ca? Idhānanda, dāyako ca hoti sīlavā kalyāṇadhammo, paṭiggāhakā ca honti sīlavanto kalyāṇadhammā— evaṁ kho, ānanda, dakkhiṇā dāyakato ceva visujjhati paṭiggāhakato ca. Imā kho, ānanda, catasso dakkhiṇā visuddhiyo”ti.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넷째이자 마지막 경우로, 주는 이와 받는 이 모두 계행을 갖추고 좋은 성품을 지닌 때입니다. 이때 보시는 두 쪽 모두로 인해 맑아진다고 하십니다. 이로써 네 가지 경우, 곧 주는 이만 맑음, 받는 이만 맑음, 둘 다 맑지 않음, 둘 다 맑음이 모두 갖추어지고, 세존께서는 “보시가 맑아지는 이 네 가지가 있느니라”는 말씀으로 목록을 닫으십니다. 다음 편부터는 이 네 가지를 게송으로 다시 노래하십니다.
묵상
주는 마음과 받는 자리가 함께 맑았던 순간을 떠올릴 수 있나요? 그런 순간이 지금 떠오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언젠가 그런 자리를 만나고 싶다는 바람만으로도 이미 충분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