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가에 하는 보시 일곱 가지

세존께서는 승가 전체를 향한 보시 일곱 가지를 밝히시고, 미래에도 그 결실이 크다고 이르십니다.

“아난다여, 승가에 하는 보시에는 일곱 가지가 있나니. 무엇이 일곱인가? 여래를 우두머리로 하는 남성 수행자와 비구니 두 승가에 보시하나니, 이것이 첫째 보시니라. 여래께서 완전히 열반하신 뒤 두 승가에 보시하나니, 이것이 둘째 보시니라. 남성 수행자 승가에 보시하나니, 이것이 셋째 보시니라. 비구니 승가에 보시하나니, 이것이 넷째 보시니라.

Satta kho panimānanda, saṅghagatā dakkhiṇā. Katamā satta? Buddhappamukhe ubhatosaṅghe dānaṁ deti— ayaṁ paṭhamā saṅghagatā dakkhiṇā. Tathāgate parinibbute ubhatosaṅghe dānaṁ deti— ayaṁ dutiyā saṅghagatā dakkhiṇā. Bhikkhusaṅghe dānaṁ deti— ayaṁ tatiyā saṅghagatā dakkhiṇā. Bhikkhunisaṅghe dānaṁ deti— ayaṁ catutthī saṅghagatā dakkhiṇā.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개인에게 하는 보시를 마친 세존께서는 이제 승가 전체를 향한 보시 일곱 가지로 넘어가십니다. 앞의 둘은 여래께서 계실 때와 완전히 열반하신 뒤로 시간을 가르고, 뒤의 둘은 남성 수행자 승가와 비구니 승가로 대상을 가릅니다. 눈여겨볼 것은 “여래를 우두머리로 하는 두 승가”에 보시함과 “여래께서 완전히 열반하신 뒤” 두 승가에 보시함을 나란히 놓아, 부처님이 계시지 않아도 승가에 하는 보시의 자리가 사라지지 않음을 미리 밝힌 점입니다.

묵상

한 사람이 아니라 어떤 모임이나 공동체 전체를 향해 마음을 낸 적이 있나요? 그때 마음은 한 사람을 향할 때와 어떻게 달랐나요? 떠오르는 것이 없어도 괜찮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승가로부터 나를 위해 이만큼의 남성 수행자와 비구니를 정해 주십시오’ 하고 보시하나니, 이것이 다섯째 보시니라. ‘승가로부터 나를 위해 이만큼의 남성 수행자를 정해 주십시오’ 하고 보시하나니, 이것이 여섯째 보시니라. ‘승가로부터 나를 위해 이만큼의 비구니를 정해 주십시오’ 하고 보시하나니, 이것이 일곱째 보시니라.”

‘Ettakā me bhikkhū ca bhikkhuniyo ca saṅghato uddissathā’ti dānaṁ deti— ayaṁ pañcamī saṅghagatā dakkhiṇā. ‘Ettakā me bhikkhū saṅghato uddissathā’ti dānaṁ deti— ayaṁ chaṭṭhī saṅghagatā dakkhiṇā. ‘Ettakā me bhikkhuniyo saṅghato uddissathā’ti dānaṁ deti— ayaṁ sattamī saṅghagatā dakkhiṇā.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다섯째부터 일곱째까지는 앞의 넷과 결이 다릅니다. 앞의 넷이 승가 전체나 그 반쪽을 향한 보시라면, 이 셋은 보시하는 이가 “이만큼의 인원을 정해 달라”고 승가에 청하여 그 정해진 이들에게 공양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이 여전히 “개인에게 하는 보시”가 아니라 “승가에게 하는 보시”로 분류되는 까닭은, 특정한 이름을 짚어 준 것이 아니라 승가라는 조직이 정하는 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누구인지보다 승가에 맡기는 마음이 이 보시의 성격을 정합니다.

묵상

누구에게 갈지 스스로 고르지 않고 맡겨 버리는 보시와, 정해 놓고 하는 보시는 마음가짐이 어떻게 다를까요? 무언가를 내맡길 때 오히려 마음이 더 가벼워졌던 경험이 있나요? 둘 다 자연스러운 선택이에요.

“아난다여, 미래에는 목에 가사 조각을 걸쳤을 뿐 계행이 나쁘고 못된 것들이 있으리라. 사람들은 그 계행이 나쁜 이들에게 승가를 향해 보시하리니, 그때에도 나는 승가에 하는 보시가 헤아릴 수도 잴 수도 없다고 말하노라. 어떤 방식으로도 승가에 하는 보시보다 개인에게 하는 보시가 더 큰 결실을 맺는다고는 결코 말하지 않느니라.”

Bhavissanti kho panānanda, anāgatamaddhānaṁ gotrabhuno kāsāvakaṇṭhā dussīlā pāpadhammā. Tesu dussīlesu saṅghaṁ uddissa dānaṁ dassanti. Tadāpāhaṁ, ānanda, saṅghagataṁ dakkhiṇaṁ asaṅkheyyaṁ appameyyaṁ vadāmi. Na tvevāhaṁ, ānanda, kenaci pariyāyena saṅghagatāya dakkhiṇāya pāṭipuggalikaṁ dānaṁ mahapphalataraṁ vadāmi.

맛지마 니까야 MN 142 보시 분석경 (Dakkhiṇāvibhaṅgasutta)

배경

세존께서는 승가에 하는 보시가 좋은 시절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승가가 흐트러진 미래에도 그러함을 미리 밝히십니다. “목에 가사 조각을 걸쳤을 뿐 계행이 나쁜” 이들이 나타나 그런 이들에게 승가를 향해 보시하는 때가 오더라도, 그 보시의 결실은 여전히 헤아릴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승가에 하는 보시의 힘이 그 순간 받는 개개인의 자질이 아니라 승가라는 자리 자체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결코 말하지 않느니라”는 단정으로, 이 경의 핵심 결론, 곧 승가에 하는 보시가 개인에게 하는 보시보다 항상 크거나 같다는 것을 못박습니다.

묵상

어떤 자리나 제도가 그 안의 한 사람 한 사람의 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값어치를 지닌다는 생각에, 어디까지 동의할 수 있나요? 사람에게 실망하고도 그 사람이 속한 자리 전체를 등지지는 않았던 경험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