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툼을 전해 듣고 눈먼 이들이라 이르시다

탁발에서 돌아온 비구들이 외도들의 다툼을 전하자, 세존께서는 그들이 보지 못한 채 단정한다고 진단하십니다.

그때 여러 수행자들이 아침에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사왓티로 탁발을 나갔느니라. 사왓티에서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돌아와 세존께 나아가 절하고 한쪽에 앉았으니, 한쪽에 앉은 그 수행자들이 세존께 이렇게 아뢰었느니라.

Atha kho sambahulā bhikkhū pubbaṇhasamayaṁ nivāsetvā pattacīvaramādāya sāvatthiṁ piṇḍāya pāvisiṁsu. Sāvatthiyaṁ piṇḍāya caritvā pacchābhattaṁ piṇḍapātapaṭikkantā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ṁsu;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ṁ abhivādetvā ekamantaṁ nisīdiṁsu. Ekamantaṁ nisinnā kho te bhikkhū bhagavantaṁ etadavocuṁ:

우다나 Ud 6.4 여러 외도경 (Paṭhamanānātitthiyasutta)

배경

장면이 바뀌어, 다투는 외도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수행자들이 등장합니다. 탁발을 다녀오는 일상의 동선, 곧 옷을 입고 발우를 지니고 걸식하고 돌아와 절하고 앉는 순서를 차례로 짚은 뒤에야 비로소 수행자들이 입을 엽니다. 이 정형화된 도입은 다른 여러 경에서도 되풀이되는 틀로, 지금부터 나올 말이 그날 실제로 있었던 보고임을 알려 주는 장치입니다. 사왓티의 다툼과 세존의 진단 사이에 이 짧은 일상의 장면을 끼워 넣어, 이야기의 시간과 자리를 분명히 해 둡니다.

묵상

누군가에게 어떤 일을 전할 때, 있는 그대로 담담히 전하기와 자기 생각을 보태어 전하기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오늘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전한다면 어느 쪽에 가까울지 잠시 떠올려 볼까요?

‘세존이시여, 여기 사왓티에는 여러 외도 수행자·바라문·유행자들이 머물며 저마다 다른 견해·다른 성향·다른 취향으로 저마다 다른 견해에 기대어 있습니다. 어떤 수행자·바라문들은 이런 주장을 하니 ‘세상은 영원하다, 이것만이 진실이요 다른 것은 헛되다’… 이들은 다투고 싸우고 언쟁하며 서로 입의 창으로 서로를 찌르며 지내니, ‘가르침은 이렇다, 이렇지 않다. 이렇지 않다, 이렇다’라 합니다.’

“Idha, bhante, sambahulā nānātitthiyasamaṇabrāhmaṇaparibbājakā sāvatthiyaṁ paṭivasanti nānādiṭṭhikā nānākhantikā nānārucikā nānādiṭṭhinissayanissitā— Santeke samaṇabrāhmaṇā evaṁvādino evaṁdiṭṭhino: ‘sassato loko, idameva saccaṁ moghamaññan’ti …pe… te bhaṇḍanajātā kalahajātā vivādāpannā aññamaññaṁ mukhasattīhi vitudantā viharanti: ‘ediso dhammo, nediso dhammo; nediso dhammo, ediso dhammo’”ti.

우다나 Ud 6.4 여러 외도경 (Paṭhamanānātitthiyasutta)

배경

수행자들이 세존께 아뢰는 말이 이어집니다. 앞서 세존의 말씀으로 나온 도입과 열 가지 견해, 다툼의 장면을 수행자들은 거의 그대로 되풀이해 전하는데, 원문은 '…뻬…'라는 자체 생략 표시로 열 가지 견해를 첫째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 아홉은 줄였습니다. 이는 편집자가 줄인 자리이지 이 카드가 임의로 뺀 것이 아니며, 실제로는 앞서 나온 열 가지 전부가 여기서도 되풀이된다는 뜻입니다. 수행자들의 보고가 앞서 있었던 일 그대로임을 이렇게 확인시켜 줍니다.

묵상

누군가 겪은 일을 전할 때, 중요한 부분은 남기고 반복되는 부분은 줄여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때가 있지 않나요? 오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무엇이 핵심이고 무엇이 되풀이인지 가려서 들어볼 수 있을까요?

‘수행자들이여, 외도 유행자들은 눈멀고 볼 줄을 모르니 무엇이 이롭고 무엇이 해로운지 알지 못하고,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진리가 아닌지 알지 못하느니라. 이롭고 해로운 것을 알지 못하고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알지 못한 채 다투고 싸우고 언쟁하며 서로 입의 창으로 서로를 찌르며 지내니, ‘이것이 진리다,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것이 진리다’라 하느니라.’

“Aññatitthiyā, bhikkhave, paribbājakā andhā acakkhukā; atthaṁ na jānanti, anatthaṁ na jānanti, dhammaṁ na jānanti, adhammaṁ na jānanti. Te atthaṁ ajānantā anatthaṁ ajānantā dhammaṁ ajānantā adhammaṁ ajānantā bhaṇḍanajātā kalahajātā vivādāpannā aññamaññaṁ mukhasattīhi vitudantā viharanti: ‘ediso dhammo, nediso dhammo; nediso dhammo, ediso dhammo’ti.

우다나 Ud 6.4 여러 외도경 (Paṭhamanānātitthiyasutta)

배경

수행자들의 보고를 들으신 세존께서 진단을 내리시는 대목입니다. '눈멀고 볼 줄을 모른다'는 말은 뒤에 이어질 장님 비유를 미리 던져 놓는 표현이며, 이롭고 해로운 것과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모른다는 두 겹의 부정은 이들이 잘못된 답을 골랐다는 뜻이 아니라 애초에 판단할 근거 자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툼의 원인은 어느 쪽 견해가 옳은가가 아니라, 보지 못한 채 단정하는 태도 그 자체에 있다고 짚으십니다.

묵상

내가 다 보지 못한 것을 두고 '이렇다'라고 단정 지었던 순간이 있었나요? 눈이 아직 그 부분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그 인정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한숨 돌리는 여유가 될 수도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