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무상한 것은 괴로운가, 즐거운가?” “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무상하고 괴로우며 변하기 마련인 것을 ‘이것은 나의 것, 이것이 나, 이것이 나의 자아’라고 여기는 것이 합당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Taṁ kiṁ maññasi, soṇa, rūpaṁ niccaṁ vā aniccaṁ vā”ti? “Aniccaṁ, bhante”. “Yaṁ panāniccaṁ dukkhaṁ vā taṁ sukhaṁ vā”ti? “Dukkhaṁ, bhante”. “Yaṁ panāniccaṁ dukkhaṁ vipariṇāmadhammaṁ kallaṁ nu taṁ samanupassituṁ: ‘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No hetaṁ, bhante”.
상윳따 니까야 SN 22.49 소나경 (Soṇasutta)배경
비교에 관한 두 논지 뒤, 세존께서는 소나와의 문답으로 물질의 성질을 단계마다 확인하십니다. 먼저 영원함과 무상함 가운데 무상함을, 이어 괴로움과 즐거움 가운데 괴로움을 답하게 합니다. 그 둘에 변하기 마련이라는 성질을 더한 뒤, “나의 것·나·나의 자아”라는 소유·동일시·실체화의 세 문장이 합당한지 묻고 소나는 모두 부정합니다. 세 질문은 각각 소나의 대답과 바로 맞물려 하나의 추론을 이룹니다. 수행의 논리는 변화하는 물질을 미워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성질을 근거로 세 가지 자아 주장이 합당하지 않음을 차례로 분별하는 데 있습니다.
묵상
물질을 두고 “나의 것·나·나의 자아”라는 세 표현 중 가장 익숙한 하나가 있나요? 무상함과 괴로움이라는 앞선 두 답을 함께 놓으면 그 표현은 어떻게 달리 들리나요? 세 표현을 하나씩 떼어 읽을 때 몸의 반응도 달라지나요? 분명한 답이 없거나 이 대목을 쉬어 가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