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을 깨닫고 설명해도 보지 못하는 이

세상에 속한 현상인 물질을 여래가 깨닫고 설명하지만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이를 어찌하겠느냐고 말합니다.

“수행자들이여, 여래가 깨달아 이해하고 알리고 가르치고 드러내 보이는 세상의 현상은 무엇이냐? 수행자들이여, 물질은 세상에 속한 현상이니, 여래는 이를 깨닫고 이해하느니라. 깨달아 이해하고 알리고 가르치고 드러내 보이느니라. 수행자들이여, 여래가 이렇게 알리고 가르치고 드러내 보이는데도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그 어리석은 범부, 수행자들이여, 눈멀고 눈이 없으며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이를 내가 어찌하겠느냐?”

Kiñca, bhikkhave, loke lokadhammo, taṁ tathāgato abhisambujjhati abhisameti, abhisambujjhitvā abhisametvā ācikkhati deseti paññapeti paṭṭhapeti vivarati vibhajati uttānīkaroti? Rūpaṁ, bhikkhave, loke lokadhammo taṁ tathāgato abhisambujjhati abhisameti. Abhisambujjhitvā abhisametvā ācikkhati deseti paññapeti paṭṭhapeti vivarati vibhajati uttānīkaroti. Yo, bhikkhave, tathāgatena evaṁ ācikkhiyamāne desiyamāne paññapiyamāne paṭṭhapiyamāne vivariyamāne vibhajiyamāne uttānīkariyamāne na jānāti na passati tamahaṁ, bhikkhave, bālaṁ puthujjanaṁ andhaṁ acakkhukaṁ ajānantaṁ apassantaṁ kinti karomi.

상윳따 니까야 SN 22.94 꽃의경 (Pupphasutta)

배경

부처님은 세상에 속한 현상이 무엇인지 묻고, 첫째로 물질을 들어 답합니다. 여래가 물질을 깨닫고 이해한 뒤 일곱 방식으로 드러낸다는 목록이 질문과 답에서 반복되고, 마지막에는 같은 일곱 동사가 수동형으로 다시 나옵니다. 그런데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이를 어리석은 범부·눈먼 이·눈 없는 이·알지 못하는 이·보지 못하는 이로 거듭 부른 뒤 “내가 어찌하겠느냐”고 묻습니다. 마지막의 다섯 호칭은 알지 못함과 보지 못함을 서로 겹쳐 거듭 한정하는 직접 발화입니다. 이 대목은 여래가 거듭 설명해도 듣는 이의 앎과 봄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결구이지, 특정 현대인의 인격을 평가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묵상

같은 일곱 동사가 질문·설명·마지막 조건에서 반복될 때 무엇이 강조되어 보이나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보지 못하는 이”로 판정할 필요는 없어요. 설명이 거듭되어도 이해를 강제할 수 없다는 마지막 물음에 머물러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