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수행자들이여,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성스러운 이들을 보았고 … 참된 이들의 가르침에 잘 훈련되어, 물질을 자아로 보지 않느니라. … 느낌을 … 인식을 … 의지적 형성을 … 의식을 자아로 보지 않고, 의식을 지닌 자아로 보지 않으며, 의식이 자아 안에 있다고 보지 않고 자아가 의식 안에 있다고 보지 않느니라.”
Sutavā ca kho, bhikkhave, ariyasāvako ariyānaṁ dassāvī …pe… sappurisadhamme suvinīto, na rūpaṁ attato samanupassati …pe… na vedanaṁ … na saññaṁ … na saṅkhāre … na viññāṇaṁ attato samanupassati, na viññāṇavantaṁ vā attānaṁ; na attani vā viññāṇaṁ, na viññāṇasmiṁ vā attānaṁ.
상윳따 니까야 SN 22.99 가죽 끈의경 (Gaddulabaddhasutta)배경
앞의 범부와 대칭으로 배운 성스러운 제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성스러운 이들을 보았고 참된 이들의 가르침에 잘 훈련되었으며, 다섯 무더기를 자아와 연결하는 네 관점을 부정합니다. 첫 …pe…는 그 배움과 훈련의 정형 설명을 줄이고, 둘째 …pe…와 세 말줄임표는 물질·느낌·인식·의지적 형성에도 의식에 온전히 적힌 네 부정이 반복됨을 나타냅니다. 그 순서는 의식 자체를 자아로 보지 않고, 의식을 지닌 것을 자아로 보지 않으며, 의식을 자아 안에 있다고 보지 않고, 자아를 의식 안에 있다고 보지 않는 네 방식입니다. 이를 경험이나 책임 자체가 없다는 말로 넓히지 않습니다.
묵상
의식과 자아를 잇는 네 방식, 곧 의식 자체를 자아로 보기·의식을 지닌 자아로 보기·의식을 자아 안에 두기·자아를 의식 안에 두기는 서로 어떻게 다르게 들리나요? 네 차이를 모두 설명할 필요는 없어요. 가장 낯선 하나에 잠시 머물러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