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구의 가라앉음에서 아라한의 열의로

정원에 가려던 탐구가 도착 뒤 가라앉는다는 마지막 예를 확인하고, 아라한과를 위한 열의가 성취 뒤 가라앉는 데 적용합니다.

“그대에게 전에 ‘정원에 가겠다’는 탐구가 있었습니까? 그대가 정원에 이르렀을 때 그에 따른 탐구는 가라앉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존자여.” “이와 같이 바라문이여, 그 수행자는 아라한으로서 번뇌가 다하고, 청정범행을 마치고, 할 일을 다하고, 짐을 내려놓고, 자기 목적에 이르고, 존재의 결박을 완전히 끊고, 바른 앎으로 해탈하였느니라. 그에게 전에 아라한과에 이르려는 열의가 있었으나, 아라한과에 이르면 그에 따른 열의가 가라앉느니라.”

“Ahosi te pubbe vīmaṁsā ‘ārāmaṁ gamissāmī’ti? Tassa te ārāmagatassa yā tajjā vīmaṁsā sā paṭippassaddhā”ti? “Evaṁ, bho”. “Evameva kho, brāhmaṇa, yo so bhikkhu arahaṁ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ṁyojano sammadaññāvimutto, tassa yo pubbe chando ahosi arahattappattiyā, arahattappatte yo tajjo chando so paṭippassaddho;

상윳따 니까야 SN 51.15 제사를 맡는 계층의 운나바에 관한 경 (Uṇṇābhabrāhmaṇasutta)

배경

정원 예시의 넷째 항목인 탐구를 묻고 같은 긍정 답을 받은 뒤, 아난다는 “이와 같이”라는 연결로 아라한에게 적용합니다. 앞의 탐구가 목적지에서 가라앉은 구조와 아라한과를 위한 열의가 성취 뒤 가라앉는 구조가 이어집니다. 아라한을 설명하는 여덟 요소인 아라한·번뇌가 다함·청정범행을 마침·할 일을 다함·짐을 내려놓음·자기 목적에 이름·존재의 결박을 완전히 끊음·바른 앎으로 해탈함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수행적으로는 성취를 향한 열의가 성취 뒤에는 그에 맞게 가라앉는다는 적용을 첫 항목에서 확정합니다.

묵상

정원에 이른 뒤 탐구가, 아라한과에 이른 뒤 그에 따른 열의가 가라앉는다는 두 장면은 목적과 과정의 관계를 어떻게 보여 주나요? 자신의 성취를 평가할 필요는 없어요. 작은 목적 하나가 이루어진 뒤 더는 필요하지 않았던 움직임이 있었는지만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