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아라한과에 이르려는 정진이 있었으나, 아라한과에 이르면 그에 따른 정진이 가라앉느니라. 전에 아라한과에 이르려는 마음이 있었으나, 아라한과에 이르면 그에 따른 마음이 가라앉느니라. 전에 아라한과에 이르려는 탐구가 있었으나, 아라한과에 이르면 그에 따른 탐구가 가라앉느니라. 바라문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끝이 있는 것입니까, 끝이 없는 것이 아니는가?”
yaṁ pubbe vīriyaṁ ahosi arahattappattiyā, arahattappatte yaṁ tajjaṁ vīriyaṁ taṁ paṭippassaddhaṁ; yaṁ pubbe cittaṁ ahosi arahattappattiyā, arahattappatte yaṁ tajjaṁ cittaṁ taṁ paṭippassaddhaṁ; yā pubbe vīmaṁsā ahosi arahattappattiyā, arahattappatte yā tajjā vīmaṁsā sā paṭippassaddhā. Taṁ kiṁ maññasi, brāhmaṇa, iti evaṁ sante, santakaṁ vā hoti no asantakaṁ vā”ti?
상윳따 니까야 SN 51.15 제사를 맡는 계층의 운나바에 관한 경 (Uṇṇābhabrāhmaṇasutta)배경
아라한과에 이른 뒤 열의가 가라앉는다는 앞 대목에 이어, 정진·마음·탐구도 같은 구조로 차례로 놓습니다. 세 항목마다 전에 아라한과에 이르려는 작용이 있었고, 실제로 이르면 그에 따른 작용이 가라앉는다는 조건과 결과가 반복됩니다. 열의까지 합하면 정원 예시의 네 항목과 수와 순서가 정확히 대응합니다. 끝의 “바라문이여, 어떻게 생각합니까?”는 아난다가 다시 청자를 부르는 말이며, 끝이 있는 것인지 끝이 없는 것이 아닌지를 묻습니다. 수행적으로 목적 달성 뒤 네 바탕이 각각 가라앉는다는 전체 적용이 이 질문의 근거가 됩니다.
묵상
열의에 이어 정진·마음·탐구도 목적을 이루면 가라앉는다는 반복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항목은 무엇인가요? 네 가지가 모두 같은 방식으로 느껴질 필요는 없어요. 어떤 일 하나가 끝난 뒤에도 남은 움직임과 자연스럽게 잦아든 움직임을 구별해 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