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문이여, 탐욕스러운 이는 탐욕에 압도되고 마음을 빼앗겨 자신을 해칠 생각도, 남을 해칠 생각도, 둘 다 해칠 생각도 하며, 정신적 괴로움과 근심을 겪느니라. 탐욕을 버리면 자신도, 남도, 둘 다 해칠 생각을 하지 않고, 정신적 괴로움과 근심을 겪지 않느니라. 탐욕스러운 이는 … 몸과 말과 마음으로 나쁜 행위를 하느니라. 탐욕을 버리면 몸과 말과 마음으로 나쁜 행위를 하지 않느니라.
“Ratto kho, brāhmaṇa, rāgena abhibhūto pariyādinnacitto attabyābādhāyapi ceteti, parabyābādhāyapi ceteti, ubhayabyābādhāyapi ceteti, cetasikampi dukkhaṁ domanassaṁ paṭisaṁvedeti. Rāge pahīne nevattabyābādhāyapi ceteti, na parabyābādhāyapi ceteti, na ubhayabyābādhāyapi ceteti, na cetasikaṁ dukkhaṁ domanassaṁ paṭisaṁvedeti. Ratto kho …pe… kāyena duccaritaṁ carati, vācāya duccaritaṁ carati, manasā duccaritaṁ carati. Rāge pahīne neva kāyena duccaritaṁ carati, na vācāya duccaritaṁ carati, na manasā duccaritaṁ carati.
앙굿따라 니까야 AN 3.53 제사를 맡는 계층의 한 사람에 관한 경 (Aññatarabrāhmaṇasutta)배경
세존의 첫 답은 탐욕이 있는 때와 버려진 때를 두 층위에서 대조합니다. 먼저 탐욕에 압도되고 마음을 빼앗기면 자신·남·둘 모두를 해칠 생각을 하고 정신적 괴로움과 근심을 겪지만, 탐욕을 버리면 세 해침의 생각과 두 마음의 고통이 모두 부정됩니다. 이어 원문은 탐욕스러운 이의 앞 정형구를 ‘…pe…’로 줄이고, 몸·말·마음의 나쁜 행위를 하거나 하지 않는 대칭을 온전히 적습니다. attā·para·ubhaya의 세 대상과 kāya·vācā·manas의 세 행위 영역을 빠뜨리지 않는 것이 핵심입니다. 수행의 의미는 탐욕을 정체성으로 단정하지 않고, 탐욕의 지배와 버림이 의도·느낌·행위를 어떻게 달리 조건 짓는지 보는 데 있습니다.
묵상
탐욕이 마음을 채울 때 자신·남·둘 모두 가운데 누구를 해칠 생각이 먼저 나타나는지 알아차릴 수 있나요? 자신을 탐욕스러운 사람이라고 규정할 필요는 없어요. 지금은 생각과 정신적 괴로움, 행동 가운데 한 가지만 살펴보아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