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흘러들어 괴롭히는 것들을 끝내는 길을 바로 알다

집중된 마음을 번뇌의 소멸을 아는 데 기울여 괴로움과 번뇌의 구조를 있는 그대로 압니다.

“그렇게 집중된 마음이 깨끗하고 밝으며 흠과 오염이 없고 부드럽고 쓰기 좋으며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을 때, 번뇌가 다함을 아는 데 마음을 기울이느니라.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아느니라. ‘이것들은 번뇌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 ‘이것은 번뇌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아느니라.”

So evaṁ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āsavānaṁ khayañāṇāya cittaṁ abhininnāmeti. So ‘idaṁ dukkhan’ti yathābhūtaṁ pajānāti …pe… ‘ayaṁ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yathābhūtaṁ pajānāti; ‘ime āsavā’ti yathābhūtaṁ pajānāti …pe… ‘ayaṁ āsav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yathābhūtaṁ pajānāti.

앙굿따라 니까야 AN 3.59 자눗소니경 (Jāṇussoṇisutta)

배경

세 번째 밝은 앎은 같은 집중된 마음을 번뇌가 다함을 아는 데 기울이는 데서 시작합니다. 먼저 괴로움과 그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이어 번뇌와 그 소멸로 이끄는 실천을 있는 그대로 압니다. 두 곳의 기원과 소멸에 대한 중간 항목은 공식 root가 각각 ‘…pe…’로 줄였으므로 인용도 같은 두 표지를 보존합니다. 이 구조는 괴로운 현상만 따로 떼어 없애는 처방이 아니라, 그 기원과 소멸과 실천까지 함께 보는 앎입니다. 수행의 의미는 번뇌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그것이 끝나는 길로 마음을 기울여, 다음 대목의 실제 해탈이 일어날 조건을 갖추는 데 있습니다.

묵상

괴로움이나 번뇌가 나타나면 결과만 빨리 없애려 하나요? 그것이 무엇이며 어디서 일어나고 어떻게 멎고 어떤 실천이 그 소멸로 이끄는지 함께 보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지금은 네 갈래 가운데 하나만 분명해도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