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자도 깨달을 수 있는가?

출가하지 않고도 성자가 된 사람들 - 경전이 보여주는 증거

사리뿟따여, 흰 옷을 입은 재가자로서 다섯 가지 학습계율에 자신의 행위를 단속하고,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머무는 네 가지 높은 마음의 경지를 원하는 대로 어렵지 않게 힘들이지 않고 얻는 자가 있음을 그대들은 알아야 하느니라. 그는 원한다면 스스로 자신을 이렇게 선언할 수 있느니라. “나는 지옥을 다하였고, 축생의 모태를 다하였고, 아귀의 세계를 다하였고, 나쁜 곳과 비참한 곳과 타락한 곳을 다하였다. 나는 수다원이니, 나쁜 곳에 떨어지지 않고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결정된 자이다.”

Yaṁ kañci, sāriputta, jāneyyātha gihiṁ odātavasanaṁ pañcasu sikkhāpadesu saṁvutakammantaṁ catunnaṁ ābhicetasikānaṁ diṭṭhadhammasukhavihārānaṁ nikāmalābhiṁ akicchalābhiṁ akasiralābhiṁ, so ākaṅkhamāno attanāva attānaṁ byākareyya: ‘khīṇanirayomhi khīṇatiracchānayoni khīṇapettivisayo khīṇāpāyaduggativinipāto, sotāpannohamasmi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ṇo’ti.

앙굿따라 니까야 AN 5.179 재가자 경 (Gihisutta)

배경

재가자의 깨달음에 대한 부처님의 직접적인 확인입니다. 아나타삔디까 장자가 오백 명가량의 재가 신자와 함께 찾아온 자리에서, 부처님은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흰 옷을 입은 재가자”가 다섯 가지 학습계율에 자기 행위를 단속하고 네 가지 경지를 얻으면, 스스로 “나는 수다원이다”라고 선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머무는 네 가지 높은 마음의 경지”는 선정이 아니라, 이 경 안에서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 그리고 “성자들이 좋아하는 계”로 곧바로 풀이됩니다. 출가만이 깨달음의 길이 아님을 부처님 자신이 밝히신 대목입니다. 물론 출가가 더 유리합니다 - 세속의 의무에서 자유로우니까요. 그러나 출가하지 않아도 깨달음의 문은 열려 있습니다.

묵상

"출가하지 않으면 진짜 수행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나요? 부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재가자로서 할 수 있는 수행 - 오계, 명상, 보시, 자비 - 만으로도 수다원이 될 수 있습니다. 조건의 부족을 탓하지 말고, 가능한 것부터 시작해 보세요.

“고따마 존자와 남성 수행자·비구니는 제쳐 두겠습니다. 흰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살며, 다섯 낮은 족쇄를 다해 저절로 태어나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고 그 세계에서 돌아오지 않는 남자 재가 제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왓차여, 그런 남자 재가 제자는 백 명만이 아니고 이백·삼백·사백·오백 명만도 아니며, 훨씬 더 많다.”

“Tiṭṭhatu bhavaṁ gotamo, tiṭṭhantu bhikkhū, tiṭṭhantu bhikkhuniyo. Atthi pana bhoto gotamassa ekupāsakopi sāvako gihī odātavasano brahmacārī yo pañcannaṁ orambhāgiyānaṁ saṁyojanānaṁ parikkhayā opapātiko tattha parinibbāyī anāvattidhammo tasmā lokā”ti? “Na kho, vaccha, ekaṁyeva sataṁ na dve satāni na tīṇi satāni na cattāri satāni na pañca satāni, atha kho bhiyyova ye upāsakā mama sāvakā gihī odātavasanā brahmacārino pañcannaṁ orambhāgiyānaṁ saṁyojanānaṁ parikkhayā opapātikā tattha parinibbāyino anāvattidhammā tasmā lokā”ti.

맛지마 니까야 MN 73 왓차 긴 경 (Mahāvacchasutta)

배경

셋째 질문은 출가자 둘을 지나 흰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남자 재가 제자에게 갑니다. 이 무리의 결과는 아라한과 같은 두 해탈이 아니라 다섯 낮은 족쇄의 소멸, 저절로 태어남,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 그 세계에서 돌아오지 않음의 네 관계입니다. 세존은 이들도 백·이백·삼백·사백·오백 명만이 아니라 훨씬 더 많다고 답합니다. “재가자”만 남기지 않고 흰옷·청정한 삶·다섯 족쇄·불환의 조건을 모두 보존했습니다.

묵상

출가 여부와 다른 구체적인 성취 기준이 재가 제자에게 제시되는 점이 어떻게 들리나요? 자신의 위치를 판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다섯 낮은 족쇄와 돌아오지 않음이라는 두 표현만 구별해 볼까요?

“그러면 세존이시여, 어디까지로 재가 신자가 계를 갖춥니까?” “마하나마여, 재가 신자가 산 것을 죽이기를 멀리하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기를 멀리하고, 삿된 음행을 멀리하고, 거짓말을 멀리하고, 술과 발효주 등 취하게 하여 방일의 원인이 되는 것을 멀리할 때 - 마하나마여, 이만큼으로 재가 신자가 계를 갖춘다.”

“Kittāvatā pana, bhante, upāsako sīlasampanno hotī”ti? “Yato kho, mahānāma, upāsako pāṇātipātā paṭivirato hoti, adinnādānā paṭivirato hoti, kāmesumicchācārā paṭivirato hoti, musāvādā paṭivirato hoti, surāmerayamajjappamādaṭṭhānā paṭivirato hoti—ettāvatā kho, mahānāma, upāsako sīlasampanno hotī”ti.

상윳따 니까야 SN 55.37 마하나마경 (Mahānāmasutta)

배경

첫 문답이 재가 신자가 되는 기준을 밝혔다면, 둘째 문답은 첫 번째 갖춤인 계의 범위를 묻습니다. 답은 산 것을 죽임·주지 않은 것을 가짐·삿된 음행·거짓말·술과 발효주 등 취하게 하여 방일의 원인이 되는 것을 같은 ‘멀리하다’의 관계로 나란히 둡니다. 질문과 결론의 ‘계를 갖추다’가 이 다섯 항목을 하나로 묶습니다. 수행적으로 계는 막연한 선함이 아니라 몸과 말과 취하게 하는 것에 관한 다섯 경계를 지키는 일로 구체화됩니다.

묵상

다섯 항목 가운데 오늘 한 선택과 가까이 닿는 것이 있나요? 잘 지켰는지를 채점할 필요는 없어요. 어떤 행동 앞에서 멈추거나 방향을 바꿀 여지가 있었는지, 혹은 지금은 살펴보기 어렵다고 느껴지는지만 알아차려도 괜찮아요.

“그만하여라, 바깔리여. 이 썩어가는 몸을 보아 무엇 하겠느냐? 바깔리여, 가르침을 보는 사람은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사람은 가르침을 보느니라. 가르침을 보면서 나를 보고, 나를 보면서 가르침을 보느니라.”

“Alaṁ, vakkali, kiṁ te iminā pūtikāyena diṭṭhena? Yo kho, vakkali, dhammaṁ passati so maṁ passati; yo maṁ passati so dhammaṁ passati. Dhammañhi, vakkali, passanto maṁ passati; maṁ passanto dhammaṁ passati.

상윳따 니까야 SN 22.87 바깔리경 (Vakkalisutta)

배경

바깔리가 직접 뵙지 못한 일을 후회하자 세존은 자신의 몸을 pūtikāya, 썩어가는 몸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보는 데 무엇이 있겠느냐고 되묻습니다. 이어 dhamma를 “가르침”으로 옮겨, 가르침을 보는 사람과 자신을 보는 사람의 관계를 두 문장으로 말하고, 현재분사 passanto를 써 같은 뜻을 다시 두 문장으로 밝힙니다. 네 관계를 한 표어로 줄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본다”는 말을 어디에서나 원하는 의미를 찾는 일로 넓히지 않고, 곧 이어지는 다섯 무더기의 관찰과 연결합니다.

묵상

누군가의 몸이나 모습과 그가 전한 가르침을 구별하라는 말이 어떻게 들리나요? 사람을 직접 만나야만 이해할 수 있다고 느꼈던 일이 있나요? 그 생각을 탓하지 말고, 지금 읽는 가르침 자체에서 확인할 한 문장만 골라도 괜찮아요.